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썬마마 Mar 30. 2023

내 아이는 아파도, 당신은 아프지 마

부부의 애정이란 봄철의 주꾸미 같은 것

"내가 머리가 지끈지끈하고, 목도 좀 아픈 것 같아."

점심시간에 전화를 받았는데, 남편이 이런 얘기를 했다.

아이한테 감기가 옮았나 보다


최근에 써니가 감기가 된통 걸려서, 요 며칠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아이가 자다가 토할 듯이 기침하다가,

벌떡 일어나 앉아 또 한참 기침을 하다가,

그러다 너무 괴로우면 앉은자리에서 울고 있었다.

그러면 옆에서 자던 나도 덩달아 일어나서, 열도 재보고, 약도 더 먹여보고, 물도 좀 먹이고, 안아서 재워줄까 하고 품도 내어주고..

아픈 아이를 보고 있으면, 나도 너무 마음이 아팠다.

3일 정도 그런 밤을 보내고 나니, 얘도 하루종일 비몽사몽, 나도 하루종일 정신이 안 들었다.

아픈 게 네 탓이겠니, 원래 아이는 아프면서 크는거야..

그저 내 아기에게는 인자하기 그지없는 간호의 천사였다.


그런데 말이지, 이렇게 밤새 병간호는 내가 했는데, 왜 다른 방에서 푹 주무신 남편이 몸이 안 좋은 걸까?

쬐끔 아아주 쬐에끔 짜증이 밀려온다.

(남편이 내 브런치를 구독하고 있어서 심한 말은 못쓴다.)


애가 아프면 오로지 걱정만 되는데, 남편이 아프면 걱정도 되지만 약간의 짜증도 나게 된다.

애가 아파서 간호하는 건 당연히 내 할 일이지만, 남편이 아파서 간호하는 건(+독박육아) 갑자기 떠맡게 된  강제의무 같은 느낌이랄까..

혹은 같이 통나무를 짊어지고 산꼭대기에 올라가는데, 같이 들고 가고 있던 동료가 갑자기 다리를 다쳤다고 드러누운 느낌이랄까?

 그래서 '제발 아프지 마라!'라는 기도가 조금은 다른 어조로 남편과 아이에게 향한다.


일단 집에 와서 감기약 먹자는 얘기로 전화를 끊었다.

시간이 좀 지나자, 머리가 지끈지끈한데도 점심 먹고 일해야 하는 남편이 좀 짠하게 생각됐다.

짜증 나지만 걱정되는 그런 모순적인 마음이다.

부부란 이런 양가적인 감정을 갖게 해주는 관계인가 보다.




점심을 먹고 장을 보다 보니, 주꾸미가 눈에 보인다.

그러고 보니 벌써 주꾸미 철이다.

개인적으로 난 그렇게 주꾸미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지만. 남편이 참 좋아하는 식자재이다.

우리 기력 없는 남편을 위해 몸보신이나 해줄까 해서, 한 팩 집어 들었다.


집에 와서, 재료를 씻으려고 보니

아뿔싸, 손질이 안 된 주꾸미다.

얼른 네이버로 '주꾸미 손질하는 법'이라고 검색해 본다.


가위로 눈을 잘라내고, 이빨을 뽑아내고, 머리를 뒤집어 내장을 제거하라고 한다.

으악, 설명도 끔찍하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미끄덩거리는 주꾸미 대가리를 잡았다.

물컹 미끄덩.

맨손으론 못하겠다.

고무장갑을 끼고 다시 도전한다.

생각 외로 이빨은 힘을 주어 누르니, 뽁 하고 잘 튀어나왔다.

나온 부분을 가위로 톡 잘라준다.


그리고 눈을 잘라야 하는데..

주꾸미가 날 노려본다.


날 먹고 얼마나 잘 사나 두고 보자


나에게 원한을 갖지 마렴, 내가 널 죽인 건 아니란다

물론 나의 소비가 있기에, 공급이 있던 것이겠지만..

시선을 살짝 돌리고 주꾸미 눈을 자르다가, 손에 끼고 있던 고무장갑을 잘랐다.

아, 고무장갑 아깝다. 산 지 얼마 안 됐는데..


고무장갑의 희생으로 이제 마지막 내장만 제거하면 끝이다.

그런데 머리가 잘 안 뒤집어진다.

그래서 그냥 가위로 잘라서 머리를 열었다.

내장에서 각종 액체가 흐른다. 먹물도 터진다.

새끼손가락이 잘려나간 고무장갑이라도 끼고 있어서 다행이다.

아, 정말 난 이런 문어과 애들이 싫다.


여차저차 주꾸미 손질을 하고, 각종 야채와 코인육수, 쯔유로 맛을 낸 육수에 주꾸미를 살짝 데쳤다.

살이 탱글탱글하면서 부드럽고 달았다.


저녁때가 되어, 퇴근해서 식탁에 앉은 남편에게 가장 큰 주꾸미를 건네준다.

진짜 진짜 힘겹게 당신을 위해 준비했어.

내가 당신을 이만큼 주꾸미 한다오.




오늘 점심에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어제 여보가 해준 보양식 덕인지, 오늘은 몸이 좀 괜찮아."


그것 참 다행이구려.

기력회복한 김에 오늘밤은 나를 위해...

.

.

.

아이는 여보가 재워줄 거지?


매거진의 이전글 미니멀리스트 살림러의 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