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돈 적게 주는 아내의 항변
최근에 개인적인 사유로 남편의 주택청약저축을 깨고, 새로 청약저축을 들 일이 생겼다.
오랫동안 갖고 있었기에 아깝긴 했지만, 어차피 우리는 서울에 사는 1 주택자이고 지금 살고 있는 집을 꽤 좋아하기 때문에, 청약통장을 변경해야 하는 일에 큰 주저함은 없었다.
예전에 청약이 가능할까 싶어서 예탁금을 600만 원을 채워 넣었는데, 이번에 해지하게 되면 그 돈은 그대로 우리의 현금 자산이 될 예정이다.
"그런데, 그 6백만 원 중에 2백만 원은 내 돈 아냐?
내가 예전에 지방에서 청약하려고 2백만 원 넣어놨었 던 것 같은데?"
남편이 말했다.
"그래서 그 2백만 원 달라고?"
"아니 뭐 안되면 이자라도?"
웃으면서 하는 말이었는데, 두고두고 곱씹어보니 슬슬 짜증이 밀려온다.
더군다나 이 날은 남편이 수영장에서 본인 수영동기들이랑 노닥거리느라고 배고픈 나랑 아이랑 기다리는 거 알면서도 밖에서 20분간 세워 놓은 날이었다.
안 그래도 안 예쁜 날에, 안 예쁜 소리만 골라하네.
내가 정말 치사해서 자꾸 돈 얘기 안 하려고 했다.
날 만나기 한참 전, 돈을 크게 불리고 싶었던 치기 어린 20대의 남편과 리먼 형제가 만났을 때 얼마나 큰 사달이 났을지 이건 자세하게 말하지 않겠다.
그저 결혼식 직전에 남편의 재정 상태를 알게 됐던 친정아버지는 한숨을 쉬시며 아무 얘기 없으셨고, 내 친구들이나 그의 친구들이나 모두 남편이 나를 떠받들고 살아야 한다고 장난스레 얘기할 정도였다.
그런 재정적인 상태도 다 무마시킬 정도로, 난 순수해 보이는 그의 외모와 말투가 좋았고, 지금 생각해도 참 좋은 선택이었다.
빚으로 가려지기는 그는 너무 빛이 났고,
난 저평가주를 발굴했다 생각했고 올인했다.
최근에 아이가 말했었다.
"이 집은 아빠가 산거잖아~."
그래서 내가 대답했다.
"아니야, 아가. 이 집을 살 때 돈은 엄마가 냈어.
엄마의 과거와 아빠의 미래를 합쳐서 산 집이야. "
(아가, 엄마가 돈을 못 벌어서 지금 집에 너랑 있는 게 아니란다?)
내가 피땀 흘려 모은 월급과 우리 사주, 희망퇴직금을 모아서 만든 현금과 남편의 대출이 만든 집이었다.
그런데, 그런 히스토리가 있던 이 남편님이 나랑 결혼하기 전에 통장에 넣었던 200만 원이 자기 돈이라고 주장한다.
아, 진짜.
저번 여름에 전기세를 50만 원씩 써가면서 이더리움 채굴할 때도, 전기세 달라고 할 때마다 내 쪽에서 구걸해야 돼서 정말 짜증 났는데, 왜 남편은 자기 돈만 그렇게 챙기려고 할까?
(채굴 시작할 때, 본인이 전기세는 다 내겠다고 먼저 약속했었다.)
물론 용돈이라는 게 항상 부족하고, 내가 벌어오는 돈 내가 자율적으로 쓰지 못하는 것에 대한 상실감인 거 안다.
돈을 더 준다고 남편이 허튼짓할 사람도 아니란 거 아는데, 그냥 내 돈 네 돈 가르는 게 너무 서운하다.
나 지금 나만 잘 살자고 이렇게 살겠니?
나라고 돈 쓰는 게 재밌는지 왜 모르겠니?
나도 한 때 일요일 아침은 항상 강남에서 친구 만나서 브런치 먹었고, 스트레스받는 날이면 백화점 달려 나가서 신어보지도 않고 구두도 사는 그런 여자였다.
일이 바빠 일과 중에 병원도 못 가면, 쑤시는 어깨허리 부여잡고 매번 10만 원 넘는 태국마사지받으러 다녀서 마사지사랑 언니동생하는 사이였고, 친구들 모임에 "이건 내가 살게~."라고 멋지게 술값도 쏘는 그런 여자였다.
돈 있으면 스트레스도 풀리고, 자존심도 산다.
그거 왜 모르겠어 나라고.
나도 우리 남편이 친구들 모였을 때, 내 눈치 안 보고 멋지게 카드 내미는 모습을 왜 안 보고 싶겠냐고.
요즘 홈트 빡세게 해서 핏 좋아진 우리 남편, 댄디한 미중년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왜 안 꾸며 주고 싶겠냐고.
우리 그냥 같이 돈 쓸까?
나도 악역 하는 거 싫어.
여보도 여보 원하는 컴퓨터 부품 신나게 사고, 핸드폰도 신상으로 바꾸고, 신상 게임기도 사.
나도 그 좋아하는 여행도 실컷 다니고, 친구들 만나서 우아하게 브런치도 먹어야겠다.
아 친구들 만나는데, 들고 갈 가방이 하나도 없어. 내 주위 애들 명품백 하나 없는 애 없더라. 큰맘 먹고 나도하나 살까 봐. 애기 초등학교 입학하면 엄마들 죄다 명품백 들고 온대.
귀한 내 새끼 안 그래도 옷도 맨날 얻어 입히는데, 엄마마저 꾀죄죄하면 창피해서 어째~.
머리도 지금 너무 그지 같잖아. 나 작년 4월에 파마하고 지금까지 미용실 안 갔어.
이번에 샤넬백 받고 부잣집에 시집가는 사촌동생 결혼식 가는데, 머리를 어떻게 할 수 없어서 질끈 묶고 간 거 알지? 저번에 머리도 화장실에서 혼자 잘랐잖아, 커트비 25천 원 아끼려고.
내 친구들 허구한 날 호캉스 다니던데, 우리도 가자~.
애는 키즈케어 맡기고 엄마는 호텔 마사지받고 그런 거더라. 아 요즘 슬슬 인스타에 해외여행 사진 올라오더라. 비키니 입고, 인피니티 풀에서 뒷모습 찍어줘야 되는 거 알지?
마사지 그렇게 좋아하는 내가, 여보가 해주는 발마사지에 충분히 행복해하며 살고 있는데, 그나마 요즘은 그것도 안 해주잖아. 남의 손길이 그립네?
아차차, 매달 시어머니한테 드리는 용돈만큼, 친정부모님한테도 좀 드려야겠어.
우리 부모님도 용돈 되게 좋아하시는데, 내가 반찬은 그렇게 받아오면서 눈 질끈 감고 매번 그냥 돌아섰지 뭐야.
물려받을 재산도 없으니, 이렇게 쓰다간 돈이 안 떨어지고 배기겠어?
그럼 그때 돼서 나도 나가서 돈 벌어야지. 뭐 요즘 같은 세상에 남자가 생활비 다 벌어오라는 그런 여자는 아냐. 알잖아, 나 생활력 강한 거?
애도 어느 정도 컸고, 꽤 똘똘하게 키워놔서 지 앞가림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유치원은 반일반에서 종일반으로 돌리면 되지.
물론 내가 나가서 돈 벌면, 여보도 집안일은 좀 해야지.
당연히 지금처럼 퇴근시간 딱 맞춰서 저녁 차려주는 건 힘들겠지?
어때? 이 제안 군침 좀 돌아?
어떻게, 그럼 이제 200만 원 여보 갖고, 4백만 원은 원래 내 거였으니 내가 가지면 되는 건가?
서운하게 하지 마라 진짜...
그리고... 그 200만 원...
전 여자 친구랑 집 사려고 넣었던 돈이잖아...
우이씨....
나 오늘 점심 나가서 사 먹을 거야. 말리지 마....
밥먹으면서 콜라도 시켜먹을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