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이 해이해지면 더 힘들어
나는 당일 산행을 시작할 때, 후기로 뭐 쓸만한 게 있겠나 하는 생각을 한다. 26번째 백두대간 입산이다 보니 특별한 것 없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마루금 11km로 쉽게 끝날 것 같았고, 산행 다음날이 10km 마라톤이어서 체력 소모를 최소화 하자는 마음으로 가방도 초경량으로 준비했다.
역시나 아내는 오전 컨디션이 별로라 후미에서 천천히 갔다. 후미에 있던 대원들조차 오늘 산행이 무난하게 일찍 끝날 것으로 예상하며 집에 일찍 갈 헛된 꿈의 대화를 즐겼다.
몇 km 남았냐는 말에 여러 차례 답을 하면서, 거리가 좀처럼 줄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분명히 속도가 느린 느낌은 아니었는데, 결과적으로는 느렸다.
게다가 길이 엉망이었다. 눈이 없을 만한 구간을 선택했는데, 눈이 아직도 있었다. 그리고 눈이 녹아서 또, 샤베트 같은 눈길이었는데, 한술 더 떠서 진흙탕길까지 있었다. 진흙 길에서만 세 번 넘어졌다. 25차 동안 한 번 넘어져봤는데, 한 차수에 세 번이라니?! 옷이 엉망이 됐다.
후반부에 소통대장님이 발목 부상을 당하셨다. 아무래도 심한 듯하여 남편이신 선두대장을 호출했다. 선두대장님은 쏜살같이 뛰어 오셨다. 날씨대장님이 응급조치를 하는 동안 도착하셨다. 게다가 의료 대장을 맡아주고 계신 보급2대장님까지 뛰어오셔서 추가 응급조치를 했다.
날씨대장님의 테이핑, 후기대장님의 진통소염제, 보급2대장님의 마사지와 압박붕대 덕분에 소통대장님의 부상이 안정이 될 수 있었다.
응급조치 이후로, 선두대장님이 아내를 모시고 가면서, 뒤에 있는 나에게 물었다.
“정말 이 속도로 가는 거예요?”
선두대장님은 느린 속도에 많이 놀라신 듯했다. 잠시 후에는 “산을 온전히 느낄 수 있어 좋네요.”라고 하셨다. 나는 후미도 지금 최고 속도라서 산을 느낄 겨를이 없다고 반박했다. 선두 대장님이 느린 속도에 답답해서 저런 말로 정신 승리를 하고 계신 듯했다. 소통대장님이 약발이 올라오면서 좀 괜찮다고 하니, 선두대장님은 삼도봉에서 다시 선두로 쏜살같이 가셨으니까 말이다.
삼도봉 정상에서 모든 대원이 모였는데, 이구동성으로 오늘 산행이 이상하게 힘들었고, 좀처럼 11km가 끝나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우리가 정신이 해이해져서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얘기했더니, 다른 대장님들이 혀를 내두르셨다.
이번 산행이 마지막 눈길 산행이길 바란다.
출발할 때 후기에 쓸 내용이 없을까 봐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나 보다. 모든 산행은 재미있는 일들이 많다. 최근 대형 산불로 인명과 자연피해가 너무 커서 슬픔을 금할 길이 없다. 조속히 산불이 진압이 되기를 기도한다.
[산행 기록]
2025. 3. 22 백두대간 13구간(우두령~삼도봉) / 난이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