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늦은 아침, 마지막 버스를 탔다.
15분이 지나면 교실에 들어갈 수 없고, 다음 강의를 들어야 한다. 다행히 버스를 놓치지 않아 한숨 돌리고 있는데, 다음 정거장에서 장애인이 타게 되었다. 기사는 내리더니 기계를 조작하여 휠체어가 버스에 오르기 좋은 상태를 만들어 안전하게 태우고 출발했다. 운전기사는 한없이 느린 동작으로 시간에 대한 쫓김은 없어 보였다. 나는 그런 광경에 놀랄 여유도 없이 마음만 급해져 있는데, 다음 역에서 버스를 세운 아주머니가 한 참을 묻는다. 본인이 가는 방향과 버스의 노선이 맞는지를 놓고 거의 토론에 가까운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아! 제발 어서 타! 드디어 아주머니가 짐을 가득 실은 채 탔다. 휴! 한 숨이 나왔다. 버스가 막 출발하려는 데, 이상한 기분이 들었는지 아주머니는 아닌 것 같다며 다시 내렸다. 그로 인해 소요된 시간은 10분 남짓. 나는 거의 울 지경인데, 다른 사람들은 차분했다. 불평을 하거나 얼굴 찌푸리는 사람도 없었다. 느긋하게 광경을 지켜보고, 오히려 걱정까지 해주는 눈치다.
결국 첫 번째 수업은 들어가지 못하고 다음 수업에 들어갔다.
런던의 거리에는 장애인이 많다. 버스나 지하철 등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는 물론이고 쇼핑몰이나 극장, 박물관에서도 휠체어를 타거나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거동이 불편한 사람을 쉽게 볼 수 있다. 몇 개월을 살면서 처음엔 의아한 생각이 들었는데, 그것은 의식의 깨어 있음과 환경의 조성 때문이었다.
여기저기 마주치는 몸이 불편한 사람은 표정이 밝다. 우울해 보이지 않는 그들은 혼자 이거나 여럿이거나 주눅 들지 않고 거리에 나선다. 두려움이 없어 보이는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체질화된 도움을 받을 수 있고, 편리한 동선의 시설은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가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영국에 살면서 그러한 풍경은 익숙해졌고, 여행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웃고 떠들며 식사를 하고 다양한 전시와 오페라를 감상한다. 그들을 돌보는 사람은 그러한 상황을 불편해하지 않고, 부끄러워하거나 미안해하지도 않는다. 거리의 처음 보는 사람도 어려운 상황이 보이면 달려와 도와주거나, 눈인사를 하며 지나갔다. 한참이 지나서야 알았다. 영국에 유난히 장애인이 많은 것이 아니라, 숨지 않고 거리로 나온다는 것을.
다양한 교육은 어릴 적부터 이루어져 왔고, 제도적 환경적 장치는 동정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 '동등함'을 부여하고 있었다.
어디를 가나 그러한 모습은 쉽게 눈에 띄어 보통의 사람과 묻히기를 반복할수록 나 또한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동정이나 미안함이 아닌 ‘나와 똑같은 사람’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공평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그들의 거리와 나의 거리는 하나였고, 몸은 불편할지 몰라도 마음의 자유를 가진 모습이 아름다웠다.
한국으로 돌아오니 마음의 장애를 가진 사람이 많아 보였다.
거리의 사람은 웃음기가 없고, 때로는 불안해 보였다. 보편적이고 작은 행복에는 관심이 없고, 이상적 지위에 끌려 집단 속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어릴 적부터 자신의 가치를 따라 산 것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를 따라 살았기에 모호한 정체성은 누군가 나의 삶을 결정 대행해 주기를 바란다.
몸이 불편한 장애인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그들은 각자의 공간에 숨어 거리에 나서지 않는다.
열악한 이웃, 소외된 인간, 장애인 등과 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교육은 형식적 행사에 끝나 제대로 된 인식조차 없다. 어른들 잘못이다.
그림과 음악을 감상하는 것은 사치가 아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은 나를 향한 진짜 사랑이다. 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역량이 생길 때 보유할 수 있는 능력도 생기고, 주위도 돌아볼 수 있다.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앞에서 떠날 줄 모르고 안경을 이리저리 맞춰 가며, 숙연히 앉아 있던 휠체어 탄 남자, 그 뒤에 바짝 붙어 휠체어를 끌던 여자.
그들이 꿈꾸는 세상은 그림 속에 있었을 까.
2014. London
photo by 원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