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에서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중에 신기한 것을 발견했다. 어느 라인이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줄을 서려는 데 ‘Only For Women’이라는 글씨와 함께 분홍 발자국 모양의 그림이 있었다. 그 안에 내 발을 포개고, 지하철 오기를 기다렸다.
역시 분홍으로 칠해진 열차가 내 앞에 서고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와! 모두가 분홍이다! 의자도 손 잡이도... 이쁘네...!
그때 검은 양복의 한 신사가 열차를 놓칠 듯 급하게 뛰어들었다. 신사는 빠른 속도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다시 빠르게 내려 옆 칸으로 옮겨 탔다. 순간에 벌어진 일이고, 곧바로 열차는 출발했다.
웃음이 났다. 어쩜 그리도 순발력이 좋은지! 정말 빠르네!
가만히 보니 옆 칸의 신사는 숨을 헐떡이며 넥타이 끈을 풀고 있었다. 그냥 문을 열고 옆 칸으로 이동하면 될 것을 굳이 내리고 다시 타다니, 퍽이나 당황했나 보다.
분홍으로 칠해진 여자 칸은 왠지 더 밝고 화사해 보였으며, 자리도 많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옆 칸의 남자들은 빼곡히 들어찬 기차 안을 움직이기도 힘들게, 이리저리 흔들리며 몸을 맡기고 있었다.
남자 칸에는 간간히 여자들의 모습도 보인다.
만약 연인이나 가족이 지하철을 타게 되면, 서로 갈라져 타거나 여자가 남자 칸으로 옮겨 가야 하나?
오죽하면!이라는 생각과 이건 너무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교차했다.
그리고 보니 우리나라에서도 의견이 있었던 것 같다.
국민학교(우리 때는 그렇게 불렀다)에 다닐 때, 우리 학교는 3학년까지만 남녀가 합반이었고, 4학년부터는 나뉘어서 공부했다. 그 사실을 몰랐던 어린 나는 겨울 방학이 시작되기 전 담임 선생님께서 4학년 반을 불러 주시는데, 내가 속한 반에는 모두가 여자아이뿐이었다. 나는 그때 무척 섭섭했다. 친한 남자아이가 너무 멀리 떨어진 건물의 외딴곳으로 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 중학교, 고등학교.. 하필 대학교까지 여자들만 있는 공간에서 공부를 했다.
아!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지금도 대학 동창회를 나가면 우리끼리 그런다.
"아! 재미없어! 다 아줌마뿐 이잖아!"
운이 좋아 남녀공학을 한 번이라도 다닌 친구들은 동창회가 재미있다. 내가 보기엔 그렇다.
무슨 음탕한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나이 들어 서로의 주름진 얼굴을 바라보며, 그때 누가 누굴 좋아했고 누가 젤 인기가 있었는지... 낄낄대며 수다 떠는 그들이 부럽고, 여자와 남자의 상반된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이야기도 신선하기 때문이다.
요즘 '82년생 김지영'이란 영화가 연일 화제가 되고 있다.
좋은 평도 많지만, 날 선 비판 또한 만만치 않다. 그저 사람 이야기를 다루고 있을 뿐인데,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은 '사람의 시선'이 아닌 '남성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사실 이 영화보다 더 큰 논란이나 이슈를 몰고 와야 하는 영화는 수두룩하다.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의 저자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는 그의 책에서 "페미니스트는 모든 성별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평등하다고 믿는 사람"이라 말하고 있다.*
그는 또 책에서,
"우리가 어떤 일을 거듭 반복하면, 결국 그 일이 정상이 됩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거듭 목격하면, 결국 그 일이 정상이 됩니다. 만일 남자들만 계속해서 회사의 사장이 되는 것을 목격하면, 차츰 우리는 남자만 사장이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라고 여기게 됩니다." 고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 나아가 종교, 나이, 인종 그리고 개인의 취향을 넘어 모두가 평등하다고 믿어야 한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이제 겨우 여자들은 자리 하나 씩을 차지하고, 교육받지 못한 부모 세대와는 다른 길을 걸어 가려하고 있다. 그러기에 그들은 더 고단하다. 삶은 더 나아지고 풍요로워졌는데, 이론 적으로 배우고 상상한 삶과 현실의 삶은 너무 커다란 격차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기성세대나 남성 또한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일본이 선택한 '분홍 칸, 파랑 칸'이 가장 적절한 방법이었는지 생각해 본다.
이 모습을 오랜 기간 목격하게 되면, 차츰 우리는 여자와 남자는 분홍과 파랑으로 나뉘어 기차를 타는 것이 '자연스럽다'라고 느끼게 될 것이다. 나아가 남자와 여자는 분홍과 파랑이라는 색깔을 넘어, 계속해서 둘로 나뉘는 현상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분홍과 파랑을 섞으면, 보라색이 된다.
차라리 기차를 몽땅 보라색으로 칠하고, 모두가 함께 타고 가면 어떨 까.
분홍의 힘이 더 가해 지거나, 파랑의 힘이 더 가해 지지 않도록 둘을 적당히 혼합하여 아름다운 보라 빛으로 여행하고 싶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Chimamanda Ngozi Adichi) 소설가.
1997년 나이지리아에서 태어나 자랐다. 예일 대학교에서 아프리카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인종, 이민자, 여성에 대한 문제를 주제의식으로 삼은 소설로 평단의 각광을 받으며 영미문학을 이끌 차세대 작가로 부상했다. 스웨덴에서는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를 고등학교에서 성평등 교육의 교재로 삼고 있다.
2018. 오사카
작품- 제주 이왈종 작가
photo by 원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