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감지하는 현실의 한계 인정

by 임풍

인간이 지각하는 세계는 실제 우주적 현실의 지극히 얇은 단면에 불과하다는 통찰은 오랜 철학과 현대 과학이 만나는 지점에서 더욱 분명한 빛을 띤다. 인간의 오감은 생존을 위해 최적화된 장치이지, 진리의 전체를 포착하도록 설계된 정밀한 센서가 아니다. 빛을 예로 들면, 우리 눈이 감지하는 것은 전자기 스펙트럼 중 극히 좁은 가시광선 영역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주는 X선, 감마선, 적외선, 라디오파 등 끝없는 파장으로 가득 차 있다. 인간은 그 사이를 아무것도 모른 채 걸어가는 존재이며, 맨눈으로는 우주의 광활한 실재를 거의 보지 못한다. 전자현미경이 없다면 극미한 생명체는 영원히 어둠 속에 묻혀 있을 것이고, 우주망원경이 없다면 은하와 성운의 모습은 끝내 침묵한 상태로 존재하였을 것이다.

청각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의 귀는 약 20~20,000Hz 사이의 좁은 울타리 안에서만 세계를 해석한다. 개, 박쥐, 각종 곤충들은 인간이 전혀 듣지 못하는 파장을 감지하며 살아가고, 그들이 경험하는 세계는 우리와 겹치지 않는 또 다른 층위의 현실이다. 후각, 미각, 촉각 역시 생물학적 필요가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만 작동한다. 사람의 손등 위에서는 미생물들이 쉼 없이 움직이지만 우리는 이를 보지 못한 채 깨끗하다고 착각한다. 이 작은 착각이 병을 만들고, 이런 착각들 위에서 인간의 현실 이해가 형성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일종의 생물학적 장님이다.

감각의 제한은 곧 인간이 이해하는 현실 또한 구조적으로 결핍되어 있음을 뜻한다. 우주는 풍요롭고 복잡한 스펙트럼으로 가득하지만, 인간은 그중 오감에 걸린 얇은 부분만을 현실로 수용하고 나머지는 마치 없는 것처럼 살아간다. 전파를 볼 수는 없지만 스마트폰 수신기가 그것을 번역해 줄 때에야 비로소 음악과 영상이 현실로 나타나듯, 인간의 감각 체계는 거대한 실재를 제한적으로 변환하는 초라한 인터페이스에 불과하다. 만약 장치가 없다면 주변 세계의 거의 대부분은 존재조차 알 수 없다.

칸트는 이미 18세기에 인간은 현상만 볼 뿐, 그 이면의 물자체는 영원히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인간이 경험하는 세계는 인간의 제한적인 감각과 인지 구조가 만들어낸 세계이며, 존재의 본모습은 끝내 드러나지 않는다. 현대 물리학 또한 비슷한 결론을 향해 나아간다. 양자 얽힘, 다중우주, 블랙홀의 정보 역설, 시간의 비가역성은 인간의 직관과는 전혀 다른 실재의 층위를 암시한다.

시간의 비가역성이란 시간은 자연에서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는 뜻이다. 컵은 깨지면 다시 붙지 않고, 뜨거운 것은 저절로 차가워지지 않는다. 물리 법칙 자체는 영화처럼 거꾸로 돌려도 수학적 형태가 유지되지만, 우리가 느끼는 현실에서는 엔트로피가 증가하기 때문에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만 진행한다. 그래서 시간은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블랙홀의 정보 역설도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문제다. 블랙홀은 모든 것을 삼켜 흔적 없이 사라지게 만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양자역학은 어떠한 정보도 완전히 소멸할 수 없다고 말한다. 블랙홀에 떨어진 정보가 어디로 가는지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은 이 지점에서 충돌한다.

우주적 규모에서 보면 인간은 모래알보다 작은 행성의 표면에 잠시 머무는 존재이며, 그중에서도 극미한 세포들 크기의 조합일뿐이다. 거대한 빌딩의 지하실 먼지 하나가 100층 규모 건물의 전체 구조를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이 우주 전체를 이해하려 한다는 시도는 애초에 생물학적 한계를 넘어서는 일일지 모른다.

이런 제한 속에서 인간은 언어라는 또 하나의 불완전한 도구를 가지고 세계를 설명한다. 하나의 말은 수십 가지 의미로 전달되고, 맥락, 암시, 감정에 따라 끝없이 변형된다. 의도한 말이 전혀 다른 의미로 전달되는 것은 인간 정신과 언어 자체의 구조적 특성이다. 인간의 갈등이 사소한 오해에서 시작되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인간은 세계를 부분적으로 이해하면서도 그것을 완전한 진실로 착각한다.

시간 역시 인간의 뇌가 만든 하나의 해석 틀이다. 현재라는 것은 물리적으로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극미한 과거의 잔향과 극미한 미래의 예측이 뒤섞인 흐름 상태일뿐이다. 즉 연속해서 흐르는 강물처럼 칼로 나누듯이 구분할 수 없는 것이 시간이다. 인간은 이 흐름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라는 틀을 만들어 마음을 안정시키려 한다. 그러나 스스로 만든 가짜 틀에 매이면서 후회와 불안이라는 심리적 고통을 반복한다. 오감에 잡히는 것만을 현재라고 부르지만, 사실 우리의 모든 과거적, 미래적 삶은 오감을 뛰어넘는 정신 속에서는 생생하게 살아있다.


기억과 상상을 과거와 미래라고 보지만, 사실 기억과 상상을 하는 정신에게는 감정과 기분변화를 일으키는 현재적인 현상일 뿐이다. 정신에게는 오직 영원한 현재만이 존재한다. 어떤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상상을 하는 순간, 그 시간에 했을 다른 이슈가 밀려나기 때문에, 기억과 상상이 현재로 변한다. 사실 우리의 정신은 모든 시간을 현재화시키는 타임머신이다.

모든 사실은 한 가지 결론으로 수렴된다. 인간은 자신과 세계를 거의 알지 못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비로소 더 넓은 존재 감각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생물보다 작은 존재가 우주의 전체 실재를 완전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인간의 위대함은 이 근원적 무지 위에서 질문하고 탐구하고 철학을 한다는 데에 있다. 과학의 발견이 시대마다 뒤집히는 것도 전체를 알 수 없기에 부분을 계속 수정하는 과정일뿐이다. 인간의 지성은 완성된 진리를 붙잡는 것이 아니라, 무지 위에 조금씩 빛을 더해가는 유한한 여정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이 인식하는 현실이 우주적 실재의 단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 인정 속에서 오만은 겸허로 바뀌고, 단정은 탐구로 전환된다. 의식은 넓어지고 마음은 부드러워지며, 존재의 깊이는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인간의 삶은 실재의 전체가 아니라, 전체를 향해 나아가는 끝없는 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제한성 속에서 가장 넓게 존재할 수 있다. 내 옆의 다른 사람도 비슷한 상황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연민을 느끼면, 인간관계에서의 갈등 해소에 도움이 된다. 우리는 지구에 남겨진 고장 난 뇌를 가진 우주인들이다. 서로의 한계를 이해해 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