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왜 항상 이중 기준으로 살아가는가

by 임풍

인간은 자기 스스로 이성적 존재라고 규정해 왔지만, 실제 삶에서 드러나는 모습은 놀랄 만큼 모순적이다. 우리는 공정함과 일관성을 중시한다고 말하면서도, 상황이 바뀌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전혀 다른 기준을 적용한다. 이 모순은 일부 도덕적으로 미성숙한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결함이 아니라, 인간 의식 자체에 내장된 구조적 특성에 가깝다.

인간의 판단은 언제나 나를 중심으로 형성된다. 같은 행동이라도 내가 할 때와 타인이 할 때의 의미는 전혀 다르게 해석된다. 길을 천천히 걷는 행인은 운전자의 시야에서는 방해물로 인식되지만, 보행자의 입장에서는 정당한 권리 행사일 뿐이다. 자신의 얼굴에 떠오른 찡그림은 무의식적인 반응으로 용인되지만, 타인의 찡그린 얼굴은 무례나 공격성으로 읽힌다. 이처럼 인간은 끊임없는 관점의 이동에 따라 평가 기준을 바꾸며 살아간다. 문제는 이런 이중 기준을 대부분 자각하지 못한 채, 자신의 판단을 보편적 기준으로 옳다고 착각한다는 데 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타인을 지도하거나 올바른 길로 인도하려는 시도는 근본적인 위험을 안고 있다. 내가 옳다고 믿는 가치관과 행동 양식이 과연 얼마나 보편적이며, 얼마나 일관된 것인지 스스로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가치 체계는 상황, 감정, 역할에 따라 끊임없이 변형된다. 따라서 누군가를 가르치거나 설득하려는 행위는 쉽게 도덕적 우월감이나 위선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 종교적 설교나 도덕적 훈계가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도, 그 언어가 요구하는 절대성과 실제 인간 삶의 상대성 사이에 놓인 간극 때문이다. 설교는 완결된 문장으로 말해지지만, 인간의 삶은 언제나 수정 중인 초안에 가깝기 때문이다.

철학과 문학은 오래전부터 이러한 인간의 이중성을 포착해 왔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라는 명제는 인간 안에 모순이 없다는 선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모순을 직시하라는 요청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는 극단적인 서사로 인간의 분열을 드러내지만, 현실의 인간은 훨씬 더 사소하고 일상적인 방식으로 이중성을 반복한다. 대부분의 경우 문제는 이중성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람이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는 점이다.

결국 사회는 고결한 인간들의 합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를 지탱하는 것은 도덕적 완성도가 아니라, 서로가 견딜 수 있는 불완전함의 한계선이다. 다시 말해 사회는 선의 최대치가 아니라, 선의 최소공약수 위에서 작동한다. 종교나 철학이 말하는 성화, 혹은 성선설은 인간 존재에 대한 현실적 묘사라기보다, 완전히 붕괴되지 않기 위해 인간이 스스로에게 설정한 이상적 방향표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도달 가능한 상태라기보다는, 완전한 추락을 늦추는 긴장 장치이다.

이러한 인식은 종종 인간관계와 사회 자체에 대한 환멸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다른 사람에게서 나쁜 영향을 받지 않고, 동시에 내가 타인에게 나쁜 영향을 주지 않으려면 완전히 고립된 삶이 유일한 해답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은 본질적으로 관계적이고 사회적 존재다. 생존과 치유, 언어와 의미 형성 모두가 타인과의 접촉을 전제로 한다. 완전한 고독은 논리적으로 가능해 보여도, 현실에서는 지속될 수 없는 선택지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남는 길은 무엇인가. 모순을 제거한 완벽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모순을 자각한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은 세상과 접속하는 순간 다시 세상의 방식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끌림을 감지하고, 자신이 얼마나 쉽게 이중 기준으로 작동하는 존재인지를 알아차리는 순간, 최소한 자기 기만에서는 한발 물러설 수 있다.

인간의 역사에서 사랑과 정의는 언제나 약속되었지만, 구조적으로 완성된 적은 거의 없었다. 인간이 모순적인 존재이기에 그것들이 제도나 시스템 속에서 항구적으로 구현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다만 사랑과 정의는 때때로 개인의 삶 속에서 순간적으로 출현했다가 사라지는 현상으로는 존재해 왔다. 오래 지속되지 않기에 실망을 안기지만, 완전히 부재한 것도 아니다.

인간 존재의 모순은 제거해야 할 오류라기보다, 사람이 지구에서 살아가야 할 조건이다. 어쩌면 인간에게 허락된 가장 현실적인 윤리는 모순 없는 존재가 되려는 시도가 아니라, 자신의 모순을 끝까지 인식한 채 타인과 세계를 대하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완벽함 대신 자각을 선택하는 것, 그것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지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