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에게 필요한 마음 자세

by 임풍

두 가지 우주관이 동시에 있다. 각자 자신의 우주관에 따라 오늘의 세계를 읽고 있다. 하나는 물질을 기본으로 삼는 우주관이다. 이 관점에서 세계는 분해, 측정, 교환 가능한 자원들의 총합계이며, 존재의 가치는 외부로부터 부여된다. 다른 하나는 의식과 의미를 근원으로 삶는 우주관이다. 이 시야에서는 세계가 의식의 반영이거나 의식이 세계를 형성하는 장으로 여겨지며, 삶의 가치는 의식의 폭과 관계 맺음의 깊이로 측정된다. 이 두 관점은 단순한 철학적 가치관이 아니라, 사람의 얼굴과 걸음걸이, 나아가 공동체의 방향과 시장의 작동 방식에까지 드려진 그림자다.

현대의 지배적 담론은 물질 중심적 우주관을 중심으로 형성되어왔다. 산업혁명은 단지 생산 방식의 변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들의 가치판단과 시간의 사용법, 노동의 구조를 재편성했다. 기술과 과학은 가시적이고 손에 잡히는 성과를 만들어냈고, 그러한 물질적 성과는 곧 정당화의 근거가 되었다. 18세기 중반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 이후, 관찰 가능한 것만이 실제로 인정받는 문화가 인류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따라서 측정 가능한 성취(학위, 연봉, GDP, 계좌 잔고)가 성공의 척도로 굳어졌다. 그리하여 사회적 기관들, 국가와 기업은 경쟁과 효율의 논리에 따라 조직되었고, 개인은 그러한 시스템의 작은 부품으로 기능하도록 교육되었다. 시장과 통계가 가치를 규정하고, 교육은 가치를 수치로 환산하는 법을 가르친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란 사실 물질적인 가치관의 토대에서 작동하는 시스템이다.

이런 구조 안에서 개인은 ‘왜 사는가’라는 근본 질문을 묻지 않게 된다. 동서양에서 수천 년 전부터 던져온 존재의 의미에 대한 질문이 불과 지난 250년 만에 사라졌다. 그런 질문을 던지는 순간 자신이 속한 물질적인 시스템의 전제들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대신 사람들은 의미를 숫자로 바꾸고, 불안을 투자, 소유, 획득으로 변환시키는 법을 배운다. 주식과 금융은 단순한 자산 관리가 아니라 심리적 마취제가 되었고, 소유의 확장은 존재의 불안과 공허를 일시적으로 가리는 방편이 되었다. 사람들의 얼굴은 늘 긴장 속에서 굳어지고, 표정은 계산적이며, 삶의 현재는 끊임없이 미래의 더 많은 소유로 전이된다.

하지만 21세기 인간이 상실한 내면의 의식을 중심으로 삼는 우주론적 시야는 다른 삶의 방식을 알려준다. 이 관점은 존재의 중심을 내면의 리듬과 의식의 질에 둔다. 만족은 외부의 획득에서 오지 않고, 존재의 리듬에 대한 인식에서 온다. 인간은 단순히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스스로 갱신하며 흐르는 고유한 패턴을 갖고 있다. 모든 존재는 일정한 규칙과 방향성을 통해 자신을 유지하고, 때때로 변주하며 세계와 교류한다. 심장은 박동하고, 호흡은 공기를 순환하고, 의식은 깨어남과 잠김 사이를 반복한다. 인간의 하루 루틴이나 마음의 습관, 생각이 떠오르는 방식 역시 특정한 파형을 그리며 반복된다. 이러한 주기적 흐름 전체를 가리켜 존재의 리듬이라 부를 수 있다.

이 리듬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지금 이 세계와 어떤 방식으로 맞물려 움직이는가를 보여주는 실체적 양식이다. 다시 말해, 존재의 리듬은 인간 내부의 생리적, 심리적, 영적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어 하나의 음악처럼 울려 퍼지는 형태다. 우리는 매일 몸과 마음과 영혼이 협연하여 어떤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그 리듬이 안정적일 때 인간은 삶을 경쾌하게 느끼고, 리듬이 깨질 때는 혼란과 피로, 방향 감각의 상실을 경험한다. 인간은 단순한 생산 단위를 넘어 의미를 탐구하는 존재이며, 삶의 목적은 숫자의 최적화가 아니라 관계와 경험의 깊이를 넓혀가는 것이다. 의식 중심적 관점은 세상을 하나의 노래처럼 듣는다. 고음과 저음, 반복과 변주를 구별하며 전체의 조화를 보려 한다. 따라서 표정은 부드러워지고 태도는 느긋해지며, 외부 결과에 의해 자신의 존엄이 좌우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오직 물질에 사로잡혀 있는 현대인이 깨달아야 할 방향은 무엇인가? 우선, 근본적인 물음을 회복해야 한다. ‘왜 사는가’라는 질문을 진지하게, 반복적으로 물어야 한다. 이 질문은 삶을 방치하게 만든 시스템을 멈추게 하는 최소한의 브레이크이다. 이어서, 가치의 좌표를 내면으로 이동시켜야 한다. 외부 지표는 도구로 남겨두되, 존재의 기준을 내면의 리듬, 관계의 충만, 행동의 윤리로 재설정해야 한다. 내면의 의식을 일깨우기 위해서는 일상의 리듬을 의도적으로 설계할 필요가 있다. 규칙적인 리듬은 의식의 안전판이 된다. 아침의 침묵, 걷기, 차분한 호흡, 짧은 글쓰기는 내면의 온도를 바꾸어준다. 반복과 습관은 정신적인 프로그램을 바꾼다.

이 방향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삶에 적용하면 다음과 같다. 외부 성과에 따른 판단을 줄이는 연습이 필요하다. 계좌 잔고와 사회적 위치가 곧 우리의 가치가 아니며, 그것들을 우리 정체성의 일부로 여길 이유가 없다. 의미를 생산하는 친구나 멘토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개인의 성찰도 중요하지만, 의미는 관계 속에서 풍성해진다. 무엇보다도 실천에 옮기는 자세를 복원해야 한다. 의식적 성찰과 실천은 서로 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사유가 변하면 행동이 변하고, 행동의 변형은 다시 사유를 강화한다. 그리고 과학과 물질적인 발전을 적대적으로 대할 필요가 없다. 물질세계에 대한 탐구는 소중하고, 의식의 깊이를 묻는 탐구에 소중한 도구로 쓰일 수 있다.

인간은 신이 부여한 신공지능 프로그램을 쓰는 존재이며, 자신을 스스로 재프로그래밍할 수 있다. 이 말은 허무한 은유가 아니다. 습관, 관계, 언어에 대한 의식적 선택은 실제로 우리의 행동 패턴을 바꾸고, 그 결과가 우리의 얼굴 표정과 삶의 질을 바꾼다. 하지만 새로운 행동 패턴을 설정할 때 주의할 것은, 새로 만든 패턴도 결국 우리를 지배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심신의 작동 패턴을 선택할 때 신중해야 한다. 그것은 단순한 효율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시대는 빠르고 화려하지만 방향을 잃기 쉬운 시대이다. 물질적 성취는 그 자체로 선이 될 수 없다. 반대로 의식적 삶은 결코 비생산적 유희가 아니다. 언젠가 이 화려한 세상을 떠나야 할 존재가 인생의 목적을 다시 묻고, 내면의 리듬을 조율하며, 의미의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일이다. 이것이 현대인이 깨어나야 할 길이다. 질문을 회복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외부의 숫자에 휘둘리지 않는 얼굴과 마음을 되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얼굴 모습은 우리가 어떤 우주관을 선택했는지를 가장 솔직하게 보여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