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인격적인 삶의 태도

고통을 구름처럼 바라보는 법

by 임풍

인간은 평생토록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자신을 정의하려 애쓴다. 흔히 나를 고립된 섬이나 독립된 실체라고 믿지만, 삶의 심연을 들여다볼수록 그 경계는 흐릿해진다. 마치 바다 위에 잠시 솟아오른 파도가 자신을 바다와 분리된 존재라고 믿는 것과 같다. 하지만 파도는 결국 바다의 일부이며, 잠시 형상을 갖추었다가 다시 거대한 흐름으로 돌아가는 하나의 움직임일 뿐이다. 이러한 직관은 조셉 베너가 말한 ‘비인격적인 삶(impersonal life)’의 핵심과 유사하다. 그는 인간의 자아를 주권자가 아니라, 우주적 생명이 자신을 경험하기 위해 사용하는 통로라고 보았다.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성격, 지위, 성취는 무한한 의식이 특정한 시공간 속에서 잠시 입은 옷에 불과하다.

이러한 통찰은 불교의 무아(無我) 개념에서 더욱 명확해진다. 불교에서는 우리가 나라고 집착하는 것이 사실 다섯 가지 요소의 일시적인 모임인 오온(五蘊)에 불과하다고 가르친다. 여기서 오온이란 우리의 육체(색), 느끼는 감정(수), 사물을 알아차리는 생각(상), 마음의 의지(행),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분별하는 인식(식)을 의미한다. 이 다섯 가지는 강물처럼 매 순간 변하며 흐르고 있을 뿐, 그 어디에도 변하지 않는 고정된 나는 없다. 즉 오온이 만들어낸 조금 전의 자아는 사라지고 없고, 다시 새로운 자아가 빚어낸 현상이 있을 뿐이다. 자아란 실체가 없는 환상 속의 누각(환루)과 같아서, 이를 깨달을 때 비로소 나라는 감옥에서 해방된다.

17세기 철학자 스피노자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인간을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거대한 자연 혹은 신이라는 유일한 실체가 취하는 무수한 모습(양태) 중 하나로 보았다. 파도가 바다의 한 모습인 것처럼, 우리의 기쁨과 슬픔은 전체 우주가 스스로를 표현하는 필연적인 과정인 셈이다. 조엘 골드스미스(Joel Goldsmith)는 이러한 비인격화의 원리를 실천적인 치유의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그는 질병, 가난, 공포와 같은 삶의 고통스러운 조건들을 개인적인 결함이나 나의 문제로 보지 말고, 단지 인간 의식에 비친 일시적인 비인격적인 패턴 혹은 최면적 암시로 취급하라고 가르쳤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참된 본질은 이미 완전한 신성 그 자체이며, 우리가 겪는 고통은 그 본질에 어떠한 영향도 줄 수 없는 순간적인 가상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따라서 고통을 없애려고 투쟁하는 대신, 그것이 나의 실체가 아님을 선언하고, 의식의 중심을 문제 해결의 간구 대신에 내면의 완전함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옮기는 것이 핵심이다. 이러한 비인격화의 패턴을 적용할 때, 문제는 해결해야 할 괴물에서 지나가는 구름으로 변모하며, 우리는 비로소 상황에 휘둘리지 않는 절대적인 평온을 얻는다. 먼저 내면의 완전한 신성을 자각하면, 모든 문제라고 여겨졌던 현상들이 태양 앞의 얼음처럼 녹아내린다는 인식이다. 힘든 관계나 병을 문제로 여기거나 절대자에게 치료해달라고 간구하지 말고, 모든 인간의 내면에서 역사하는 완전한 존재를 인식하면, 모든 질병이 사라진다는 관점이다.

특히 현대 물리학의 양자역학은 불교의 연기론(緣起論)과 놀라울 정도로 일치한다. 연기론이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라는 상호 의존의 법칙이다. 양자역학 역시 관측되기 전의 입자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확률적인 가능성으로 존재하며, 오직 관찰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자신의 상태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즉, 나라는 존재는 우주와 분리된 점이 아니라, 무수한 인연과 관계망 속에서 찰나마다 새롭게 구성되는 현상이다. 사람이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강한 욕구는 사실 분리된 자아의 결핍을 채우려는 몸부림이 아니라, 이 연기적 그물망 속에서 원래 하나였던 근원적 상태로 돌아가려는 존재론적 향수와 같다.

이러한 맥락에서 타인의 반응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진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타인의 비난은 나에 대한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그 사람 내면의 결핍과 힘든 경험이 밖으로 뿜어져 나온 투사 현상이다. 이를 나 개인에 대한 공격이 아닌 하나의 자연적인 현상으로 바라볼 때 불필요한 고통은 사라진다. 고대 인디언의 지혜인 4개의 언약(Four Agreements)에 나오는 "타인의 의견을 개인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라는 말과도 비슷하다. 또한 힌두교의 인사말 나마스테가 "내 안의 신성이 당신 안의 신성에게 인사합니다"라는 뜻을 담고 있듯이, 나와 타인과의 만남은 사회적 계급의 충돌이 아니라 근원적 의식끼리의 조우이다.

현대 현상학에서 말하는 판단 중지(Epoche, 에포케) 역시 유용한 도구가 된다. 이는 나라는 선입견과 고정관념을 잠시 괄호 안에 묶어두고, 지금 이 순간 흐르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태도이다. 내가 화가 났을 때 "나는 화가 났다"라고 규정하는 대신, "내 안에서 화라는 파동이 지나가고 있다"라고 관찰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예로, 가까운 친구가 나의 결점을 지적하며 날카로운 비난을 쏟아내는 상황을 가정해 본다. 평소라면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분노하거나 자책하며 나라는 요새를 지키려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겠지만, 비인격적 관점을 적용하면 대응은 전혀 달라진다. 우선 에포케(판단 중지)를 통해 '나를 공격한다'는 즉각적인 해석을 멈추고, 친구의 비난이 사실은 내 본질에 닿지 못하는 일시적인 소리의 파동임을 인지한다. 또한 연기론적 관점에서 친구의 비난은 그가 처한 오늘의 피로, 과거의 상처, 그만의 고정관념이 결합되어 나타난 일시적인 현상일 뿐임을 이해한다.

이때 나는 화를 내는 대신 "내 안에서 불쾌함이라는 감정이 구름처럼 흘러가고 있구나"라고 관찰하며, 상대 안의 고통이 비난의 형태로 표출되고 있음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처럼 비난을 개인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때, 나는 상처받지 않은 채로 상대의 말을 경청하거나 혹은 평온하게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는 자유를 얻는다. 결국 인생의 신비는 외부의 정답을 찾는 데 있지 않다. 삶은 성공과 실패를 기록하는 이력서가 아니라, 의식이 자신을 잊었다가 다시 기억해 내는 장엄한 순환의 여정이다. 고통은 제거해야 할 오류가 아니라 본래의 의식이 깨어남을 위한 촉매이며, 상처는 의식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껍질이 깨지는 과정이다.

이제 우리는 자신을 불완전한 생존 기계로 보기를 중단해야 한다. 인간의 본질은 스스로의 내적 프로그램을 인식하고 수정할 수 있는 진화 중인 의식 그 자체이다. 인생은 더 이상 해답을 요구하는 골치 아픈 질문이 아니다.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이미 완결된 응답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분리된 자아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지금 이 순간의 생명을 온전히 누리는 것이다. 그 깨달음 속에서 삶은 투쟁에서 경이로, 생존에서 신성이 연출하는 거룩한 유희로 변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