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해석이다

by 임풍

셰익스피어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 본래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다. 다만 생각이 그것을 그렇게 만든다.” 이 짧은 문장은 인간 경험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 우리가 겪는 사건들은 사실 중립적이다. 그러나 인간은 사건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각자가 가진 내면의 잣대, 즉 판단 기준을 통과시켜 해석한다. 그리고 바로 그 해석이 삶의 질을 결정한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인간이 동굴의 그림자 만을 보며 그것을 실재라 착각한다고 보았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종종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경험, 교육, 문화, 심지어 어린 시절의 기억까지, 수많은 요인들이 우리의 눈에 판단 기준이라는 필터를 씌운다. 같은 현실도 사람마다 다른 그림자로 비친다. 따라서 우리가 집착하는 해석은 종종 실재가 아니라 개인적인 투사(projection) 일뿐이다.

이 점을 통찰한 인물이 통일신라의 고승 원효대사다. 그는 불법을 더 깊이 배우기 위해 당나라로 가다가, 무덤가에서 마신 물을 계기로 깨달음을 얻었다. 어둠 속에서 맛본 물은 생명을 살리는 감로였지만, 날이 밝아 보니 그것은 해골 속의 썩은 물이었다. 즐거움과 혐오, 안도와 공포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는 이 체험을 통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곧 모든 것은 마음이 짓는 것이라는 진리를 깨달았다. 외부의 사물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현실을 만든다는 것이다.

니체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인간을 바라보았다. 그는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해석일 뿐이다”라고 보았다. 우리는 객관적 사실을 붙잡으려 하지만, 사실 그조차 여러 겹의 해석의 층위를 거치게 된다. 어떤 이는 가난을 불행으로 해석하고, 다른 이는 그 속에서 건강과 소박한 자유를 발견한다. 동일한 상황이지만, 전혀 다른 인생이 된다.

인생은 언제나 만족감과 불편함을 동시에 품고 있다. 완벽한 행복도, 완벽한 불행도 없다. 그냥 50.5%의 만족감과 49.5%의 불편함이면 족하다. 인생과 세상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변화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변화의 전체 맥락을 알 수 없기에, 순간의 단면에 집착해 스스로를 괴롭힌다. 그래서 고대 불교는 무상(無常)을 강조했고, 스토아 철학은 세상은 통제할 수 없으니 오직 해석을 통제하라고 가르쳤다.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저자인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인생을 “이상한 혼합물(strange mixture)”이라 정의했다. 착하게 보이는 사람도 거짓말을 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늘 변화 속에 살지만, 때로는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오직 내가 가진 오래된 판단 기준뿐이다. 과거 같으면 화를 낼 일에도 지금은 웃고 넘길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마음속에 새로운 필터가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곧 내면의 재탄생이다.

결국 인생은 만나는 사람이나 사건이 아니라, 해석이다. 우리가 해석을 바꾸지 못하면, 우리는 심리적 신라시대에 머물러 산다. 그러나 해석을 바꾸는 순간, 우리는 새로운 세상에 들어선다. 종교가 말하는 거듭남, 철학이 말하는 의식의 전환은 다름 아닌 마음의 창을 교체하는 일이다.

니체의 말처럼, 우리는 사실이 아니라 해석 속에 산다. 원효대사의 일체유심조처럼, 괴로움과 즐거움은 외부가 아니라 마음에서 빚어진다. 셰익스피어가 말했듯,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다. 오직 나의 해석이 그것을 만든다. 인생은 해석이다. 그리고 해석을 바꾸는 순간, 우리는 또 다른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