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자주 말한다: “인생이 힘들다.”
그러나 이 말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이미 어떤 비교의 논리를 내포한다. 무엇과 비교해 힘든가? 더 평화로운 세상? 고통이 없는 삶? 그러나 그런 상태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태어나지 않은 상태나, 동물로 사는 삶은 경험 불가능한 상상일 뿐이다. 인간의 의식이 없는 상태를 지금보다 낫다고 여기는 것은 사유의 착각일 뿐이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을 “고통과 결핍의 연속”이라 말하며, 욕망이 끝나지 않는 한 인간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이 비관주의를 단순히 절망으로 읽을 필요는 없다. 그는 동시에, 인간이 고통을 인식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의식의 고귀함으로 보았다.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단순한 본능의 피조물이 아니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만이 느끼는 이 힘듦은 오히려 존재의 깊이를 자각하는 증거 일 수 있다. 스피노자는 모든 존재를 신의 속성으로 보았고, 인간의 감정을 자연의 필연적 작용으로 이해했다. 그런 인식을 바탕으로, 그는 “슬픔이나 고통은 피할 대상이 아니라 이해해야 할 현상”이라고 말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인생이 힘들다"라고 말하는 순간은 사실 자연의 한 과정을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셈이다. 그 힘듦조차 우주적 질서 속의 필연이라면, 그 고통을 거부하기보다 이해하려는 태도 속에서 충만한 마음이 열릴 수도 있다.
2천 년 전 부처는 인생을 생로병사의 고(苦)라고 말했다. 이 역시 세상을 부정하기 위한 선언이 아니라, 현실을 바로 보는 힘(正見)에 대한 가르침이다.
부처에게 고(苦)는 불행이 아니라 깨달음의 문이었다. 삶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지 않으면 해탈의 길은 없다는 인식이다. 이 지점에서 부처의 사유는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에 영향을 주었다고 여겨진다. 하이데거는 “죽음을 직면하는 존재(Sein zum Tode)”만이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진정으로 자각한다고 말했다. 인생이 고통스럽다는 자각, 즉 "힘들다"라는 감정은 사실 존재가 자기 자신에게 말을 거는 순간이 된다. 그때 인간은 처음으로 “나는 누구인가?”, “왜 사는가?”를 묻게 되기 때문이다. 이 물음이야말로 철학의 출발이자, 인간이 짐승과 다른 이유이다.
우리가 인생을 힘들다고 느끼는 더 근본적인 이유는, 끊임없이 비교 속에서 자신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남보다 덜 가졌다”, “덜 사랑받는다”, “덜 의미 있다.” 니체는 이런 태도를 노예 도덕(Sklavenmoral)”이라 불렀다. 약자는 언제나 자신을 남과 비교하고, 타인의 평가 속에서 자기 가치를 찾는다. 그리하여 “인생이 힘들다"라는 말은 종종 세상보다 자신의 비교 습관이 만들어낸 환상이다. 니체는 반대로, “비극적 세계를 긍정하라"라고 말했다. 그에게 삶은 고통과 파괴를 내포하지만, 그 속에서도 창조와 변형의 힘이 숨 쉬고 있다고 알려준다: "아모르파티(Amor fati,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 이 말은 단순히 체념하라는 뜻이 아니다. 삶의 불완전함을 제거하려 하지 말고, 그것을 삶의 재료로 삼으라는 역동적인 선언이다. 진흙이 없으면 연꽃도 없듯, 고통 없는 인생은 성숙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인생을 거대한 드라마로 착각한다. 현재 우리 사회에 먹구름이 드리운 것처럼, 모든 뉴스가 경제 위기, 전쟁 가능성, 세계의 위기를 끝없이 전하고 있다. 사실 인류 역사에는 늘 전쟁과 경제 위기가 있어왔음에도, 그 모든 것이 나의 인생을 흔드는 듯하다. 하지만 실상, 나의 하루는 내 눈앞 100평 남짓한 현실 공간 안에서 흘러간다. 나의 인생은 전쟁터가 아니라, 나의 방, 나의 책상, 나의 걸음 속에서 살아 있다. 따라서 세상의 거대한 불안에 자신을 종속시킬 필요가 없다. 뉴스는 자본주의 사회의 상품이다. 그것은 개인의 내면적 평화를 고려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뉴스 다이어트, 즉 타인의 드라마를 끊고 나의 삶에 집중하는 일이다. 스피노자식으로 말하면, 외부의 수동적 정념에 휘둘리지 않고, 능동적 정념으로 자신을 통제하는 것이다.
“내일 지구가 무너져도 나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 이 문장은 루터의 신학적 믿음을 넘어, 인간 실존의 선언이다. 미래의 불안, 세상의 혼란, 인생의 고통, 그 모든 것 속에서도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바로 내 앞의 삶의 긍정이다. 하이데거는 이를 “현재 속에서 존재하기(Dasein im Hier und Jetzt)”라 했다. 지금 이 순간, 나의 손이 닿는 세계 속에서 내가 행동할 때, 인생은 비로소 나만의 의미의 장으로 변한다.
그 순간, 인생은 더 이상 힘든 것이 아니라, 깨어 있는 것이 된다.
물론 인생이 힘들다는 말은 틀리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부정이 아니라 깊은 자각의 표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고통은 삶의 결함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default)이다. “삶의 고통을 피하려 하지 말고, 그것을 통해 존재를 이해하라”는 지혜를 배울 필요가 있다. 그때 인생은 더 이상 고해가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발견하는, 장엄한 과정이다. 우리의 삶은 그 과정 속에서 새로운 인식의 드라마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