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 친구, 부모, 자식, 상사, 동료, 그리고 자기 자신까지, 우리가 관계를 맺는 거의 모든 대상에게 100%의 완벽함을 기대하는 순간, 인생은 곧 실망의 연속이 된다. 오히려 기대치를 60% 정도로 낮출 때, 비로소 삶이 조금은 부드러워지고, 관계 속에서 숨 쉴 여유가 생긴다. 완벽한 사람이나 완벽한 상황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우리는 '완전하게 충족되지 않음'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정신적 건강을 지키고 인간관계를 조화롭게 유지하는 길이다.
보통 직장인들은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는 상사에게 불만을 갖게 된다. 회의 때마다 지적을 받고, 자신이 쓴 보고서가 번번이 수정될 때면 속이 상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깨달을 수도 있다: “내 상사가 완벽한 리더일 거라는 기대 자체가 잘못이었구나.” 그 순간부터 상사의 단점보다 장점을 보게 된다. 결과적으로 업무 스트레스가 줄고, 오히려 일의 효율이 높아진다.
이처럼 인간관계에서 불행의 대부분은 기대치의 과잉에서 시작된다. 완벽을 요구하지 않으면, 실망도 줄어든다. 상대가 10가지 중 6가지를 해주었을 때, 그 자체로 감사할 수 있다면, 이미 마음은 평화의 상태에 들어선 것이다.
삶이 힘들면, 우리는 말한다: “현재의 관계가 너무 힘들어서, 이 도시를 떠나고 싶다.” 또는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새로 시작하고 싶다". 그러나 인간관계의 어려움은 장소의 문제가 아니다. 하와이의 푸른 바다로 떠나도, 알프스의 고요한 산속으로 들어가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문제 인물이 등장한다. 외부 환경을 바꾸면 일시적인 해방감을 얻을 수 있어도, 지속적인 마음의 평화를 얻지는 못한다. 결국 바뀌어야 하는 것은 세상이 아니라 나의 꼬인 마음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고 있다(All creation groans)”라고 했다. 이 말은 종교적인 관점에서는 세상의 모든 생명과 존재가 깨진 조화 속에서 고통받고 있지만, 동시에 회복과 구원을 향한 깊은 소망으로 신음한다는 뜻으로 읽힌다. 이처럼 이 세상은 본래 불완전하고, 존재 자체가 결핍의 상태 속에 놓여 있음을 우리는 경험한다. 그렇다면 완전한 조화와 평화를 밖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애초에 방향이 잘못된 것일 수 있다.
어쩌면 인생은 문제를 모두 제거하거나 해답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문제와 함께 살아가고 문제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과정으로 여겨진다. 몸이 한 곳 아프다가 나으면 또 다른 곳이 아프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오늘은 가족 때문에 괴롭고, 내일은 일 때문에 괴롭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된 삶이라는 증거는 아니다. 오히려 살아 있다는 증거다.
공원에서 먹이를 찾는 새들도 종일 분주하다. 그들의 하루는 고단한 생존의 연속이다. 인간도 다르지 않다. 다만 우리는 그 고단함을 문제로 이름 붙일 뿐이다. 바라보는 시각을 조금만 바꾸면, 고통은 삶의 필수 재료로 보인다. 조금 불편한 관계, 약간의 병, 일정한 스트레스는 우리를 성장시키는 일종의 내적 근육 운동이다.
역사 속 많은 철학자와 작가들은 이상향을 꿈꿔왔다. 하지만 결론은 언제나 같다. 그런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를 완벽하게 창조한 조물주가 모든 생명체의 관계까지 미리 완벽히 조율해 주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배움과 성숙이 인간의 몫으로 남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일에서 60% 정도만 만족하면, 이미 성공이다는 마음자세가 필요하다. 몸이 조금 아파도 더 나빠지지 않아서 다행이라 여기면 감사하는 마음이 생긴다. 자녀가 100점을 못 받아도 바른 마음을 지니고 자라서 고맙다고 느낀다면, 사랑이 자란다. 애인이 10가지 중 6가지만 잘해주어도, 그래도 함께 있음에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 관계는 이미 성숙한 단계다.
우리는 남보다도 자신에게 더 가혹하다. 내가 설정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자책하고, 실수 하나에도 스스로를 비난한다. 하지만 자기 자신에게도 60점만 기대하면 좋다. 오늘 완벽하지 않았지만, 어제보다 조금 나아졌다면 괜찮다. 이런 마음이 나의 삶을 유지해 준다. 나쁜 감정은 저절로 일어나지만, 좋은 감정은 노력을 해야 생긴다. 따라서 사랑과 배려는 의식적인 훈련이다. 나의 기대를 60% 충족시킨 사람에게 화내지 않고, 오히려 “그래도 잘했어”라고 칭찬할 수 있다면, 그 순간 나는 세상을 바꾼 셈이다. 칼 융의 철학처럼, 삶과 영혼에게 쉴 공간을 허락해 주어야 한다. 마음의 평화는 확실성이 아니라, 삶의 경계선에 항복하는 태도 속에 감추어져 있다. 미지의 것과 춤을 추고, 처절한 생존이 아니라 순응 속에 살아가면, 평화는 이미 내 속에서 피어난다.
인생은 흠집이 있는 그릇처럼 보이지만, 그 흠집이 갈라진 틈새로 빛을 비춘다. 완벽하지 않기에 서로가 필요하고, 기대에 미치지 않기에 연민과 사랑이 움튼다. 세상은 결코 새하얀 집처럼 깨끗하지 않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일정 수준 문제를 인정하고, 불완전함을 껴안으며 살아가는 사람만이 진정한 평화를 얻는다. 60%의 만족은 포기가 아니다. 그것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지혜이자, 삶을 고통이 아닌 선물로 바라보는 또 하나의 철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