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에서 비롯된 커리어의 시작
2014년은 포기로 기억되던 한 해다. 당시 난 스물여섯 살이었고, 방송국과 신문사 입사를 준비하던 취준생이었다. 이미 2년의 시간을 취업 준비로 허비한 때였다. 그때의 나는 지난한 취준의 시간을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애써 포장해왔다. 어쨌든 되기만 하면 ‘하고 싶은 일’을 평생 하며 살 수 있다는 일종의 정신승리였다. 직장생활 8년 차에 벌써 세 번째 직장을 다니고 있는 지금의 나는 상상하지 못할, 한 치 앞도 못 보는 애송이였다.
좋은 글로 세상을 바꾸겠다고 취업 준비를 선언할 때, 기준은 확고했다. 진보적인 중앙지의 기자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기나긴 취준은 그 기준을 하나둘씩 무너트렸다. 어느새 지방 언론사의 문도 두드렸고, 황색저널에 가까운 신문사도 일단 붙고 보자는 식으로 치르고 있었다. “저 정도 매체는 OOO 기관지 아니야?”라고 우습게 말하던 신문사의 채용공고에도 눈길이 갔다. ‘일단 붙으면’ 더 나은 회사로 이직할 수 있겠다는 막연한 자신감이 있었다. 슬슬 필기시험을 통과하고 면접장에 입장했지만 ‘최종합격’에 가닿지는 못했던 그해가 바로 2014년이었다.
스터디의 날이었다. 우린 매주 수요일에 노원역 스타벅스에 모여 논술을 썼다. 그날의 주제는 엘리트스포츠였다. 그해 2월에는 소치 동계올림픽이 있었고 6월엔 월드컵도 있었다. 스터디원들과 ‘빅토르 안’이 된 안현수의 이야기를 곁들이며 국가적 차원의 엘리트스포츠 지원이 맞는지를 기승전결에 맞게 풀어내려 했다. 히틀러가 기획한 베를린 올림픽을 검색하려고 포털사이트를 켰고, 세월호의 첫 소식을 접했다. 수학여행을 가는 학생들을 태운 여객선이 진도에서 침몰했다는 소식이었다. 스터디원들에게 소식을 전했고, 우리는 엘리트스포츠를 잠시 뒤로 하고 새로고침 버튼을 계속 눌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원이 구조되었다는 뉴스를 확인한 뒤에야 그날 논술에 집중할 수 있었다.
글을 잘 썼다. 베를린 올림픽으로 시작한 도입부와 엘리트스포츠 육성의 폐해, 생활체육 지원의 대안까지 제시해 ‘필합(필기 합격)’이 가능한 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기분 좋게 스터디를 마무리하고 집에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전원구조 뉴스는 오보였으며, 아직도 400명이 넘는 학생들은 침몰한 배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무력했다. 결국 초반에 구조되지 못한 아이들은 끝까지 돌아오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언론의 무성의함을 마주했다. 내가 그렇게도 되고 싶었던 ‘기자’라는 직업은 세월호 사건 속에서 그 어떠한 희망을 주지 못했다. 기자를 계속 꿈꿔도 될지 고민했다. 물론 그 고민 속에는 지겨운 수험생활을 끝내고 싶은, 회피성 핑계도 있었다. 계속되는 탈락 속에서 포기를 포장할 그럴싸한 핑계도 생긴 셈이었다. 지금 회고해 보면 난 포기를 하고 싶은 우는 아이였고, 누군가 뺨을 때려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10대부터 꿈꿔 온 기자를 포기하는 일은 생각보다 쉬웠다. 하지만 포기에 비해 취업은 어려웠다. 난 어느덧 장수생이 되어 있었다.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글을 쓰고 퇴고하는 일뿐이었다. 기자를 포기했을 뿐 언론사의 문은 계속 두드렸다. 그해 열린 채용 중 가장 큰 회사의 공채는 라디오 PD로 지원했다. “왜 기자로 지원하지 않았냐”라는 스터디원의 질문에 세월호라는 좋은 핑계를 댔다. 세월호는 기자를 포기하게 만든 그럴싸한 구실이었다. 결과적으로 라디오 PD 직군 역시 최종 합격까지는 가닿지 못했다. 아무렇게나 쓴 나폴레옹의 사랑 이야기로 필기시험은 어찌어찌 합격했지만, 최종 면접장에서는 결국 고배를 마셨다. 면접 이후 날 면접했던 면접관이 팟캐스트에 나와 “웬만하면 여자는 뽑지 않는다”고 말한 에피소드를 듣고 뒤늦게 분노하기도 했었다. 그렇다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난 알고 있었다. 만약 그 면접관이 여성 지원자를 뽑았다 해도, 그게 나는 아니었을 거다. 해당 직군을 더 열심히 준비해 온 누군가가 합격해야 마땅했다. 그냥 난 거기까지였다.
비대했던 자의식은 스물여섯이 되어야 줄어들었다. 스물일곱 살에는 어디든지 발을 딛어야 한다는 생각에 초조했다. 사보를 제작하는 홍보 대행사의 면접을 봤고 탈락했다. 영어점수 기준이 높지 않은 몇 군데 기업에 입사 지원도 했다. 번번이 서류에서 탈락했다. 언론사 채용에서는 그래도 면접까지 갈 수 있었던 사람이었지만, 일반 기업에서 나는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았다. 포기한 후에야 알 수 있었던 나의 위치였다. 결국 그해를 넘기고 나서야 간신히 작은 기관에 취업을 했다. 남들보다 아주 늦은 취업이었다. 두 번의 이직으로 커리어 패스를 그려나가고 있지만, 아직도 연봉협상 때마다 늦은 취업이 내 발목을 잡는다. 많은 이들에게 2014년은 거대한 슬픔으로 기억될 해다. 나 역시 거스를 수 없었다. 그러나 슬픔에서 비롯된 포기는 커리어의 시작이 됐다. 어떻게 지금의 일을 시작했는지를 물어 온 누군가의 질문에 커리어의 시작을 회고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