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데타가 드러낸 권위주의의 찌든 때

숨 가쁘게 달려온 자유민주주의가 받은 도전의 실체

by 이워너

'문민정부'가 출범한 지 이제 30년가량. 하지만 사회 전반의 권위주의를 몰아내기 시작한 것은 교육 현장에서 체벌이 밀려난 그즈음이 아닐까 싶다. 80년대 후반생인 나의 학창 시절에도 체벌은 만연했다. 초등학생이라도 교사를 거역하면 뺨을 맞고 코피가 터져도 아무 말도 못 하던 시절이었다. 교사의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았다. 권위에 대든 대가를 모두 그렇게 받아들이던 시절이다.


계급 앞에서 학대가 자행되는 권위주의의 최후의 은신처에 빛이 들어간 것도 채 몇 년이 되지 않았다. 병역 의무를 이행하는 청년들이 휴대전화를 사용하게 되면서 곰팡내 나는 권위주의의 멍석말이도 그치는 듯 보였다. 오늘날까지 몇 년 내에 대한민국 전체에서 권위주의의 찌든 때를 다 빼내기는 쉽지 않다는 걸 강제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일 평생 권위에 의존해 자존감을 지켜오던 자들이, 그 권위주의의 향수에 젖은 세대가, 스스로의 권위가 무너져감을 견디지 못하고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다행히도 권위주의를 무너뜨리기 위해 싸워오던 시민들에게 천운이 따라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뒤따라올 뒷정리의 시작에 불과했다.


수면 아래 가라앉아있던 우리들 속의 권위주의에 대한 복종의 기억이 다시 소환되고 있다. 사실 대한민국에서 권위주의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대도시권을 제외하면 대한민국의 풀뿌리는 권위주의로 작동된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노무현 대통령이 재임 중에 한미 관계를 설명하며 한 언급이 있다.


' 동네 힘센 사람이 돈 많은 사람이 “동네 길 이렇게 고칩시다, 둑 이렇게 고칩시다. 뭐 산에 나무 심읍시다.” 하면은 어지간한 사람은 따라가는 거지요.'


으레 그렇다 싶은 예시로 생각할 수 있지만 곱씹어보면 쉽게 넘어갈 부분은 아니다. 교통, 방재 등의 공공자산이라도 결국 권위를 가진 개인의 뜻에 따라갈 수밖에 없다는 예시를 우리는 너무 쉽게 납득했다. 읍면리 단위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은 더욱 쉽게 납득했을 것이다. 하지만 민주적 절차를 교육받은 세대에게 물어보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동네 사람들에게 다수결로 물어봐야 하는 것 아니에요?'가 민주 시민의 정답이 아닐까?


소도시에는 아직도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환경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지금은 먹고살기 어려워진 누군가 중에는 권위주의 아래에서 권력자에게 단물을 받아먹던 시절을 뼛속 깊이 그리워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혹은 나보다 약한 이를 배려해야 한다는 룰조차 버거워하며 줄만 서면 약자를 합법적으로 짓누를 수 있는 권위주의를 그리워하는 이들도 있다.


물질문명의 급격한 변화를 법과 사회가 따라가지 못하는 것을 두고 문화 지체 현상이라고 칭한다. 급속도로 자유민주주의를 발전시킨 대한민국에서는 정치 체제에 대한 문화 지체 현상이 관찰되는 중이다. 권위주의를 잊지 못해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군통수권자, 쿠데타를 옹호하는 권위주의 정당, 그들을 따르며 권위주의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여러 유형의 지지자들. 문화 지체는 결국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을 고상하게 칭한 것이 아닐까.


마른하늘에 날벼락같은 쿠데타를 맞이한 후 우리는 눈감고 지내던 권위주의의 찌든 때를 정면으로 맞이해야만 했다. 대도시의 민주 시민들이 생각하던 것보다 그 비율이 높다는 것부터 인정해야만 했다. 반란을 진압한 다음에는 권위주의의 그늘 아래 있는 이들을 민주 시민으로 이끌어야만 한다. 지방자치, 복지, 종교, 사회적 공정 등 문제는 뭐든지 다 수면 위로 끌어올려 하나하나 분해해야만 한다.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 다 같이 자유민주주의 아래에서 민주 시민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