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서울에 다녀오는 길이다.
한국에서 해보고 싶은 프로젝트가 있어서 우리 비즈니스 디자인팀의 수장인 조지(Georges, 네덜란드인, 남성)와 함께 서울에 왔다. 조지는 한국 방문이 처음이랬다.
우리가 방문할 회사가 북촌 한옥마을 부근에 있었다. 이런이런 한국의 아름다움을 소개하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가 아닌가. 나는 재빨리 북촌에 위치한 한식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미슐랭 1 스타를 받은 그곳에서는 창덕궁의 전경이 내려다보인다고 했다. 네덜란드에서 접하기 힘든 한식 파인 다이닝과 아름다운 창덕궁의 전망이라니 - 절대 실패할 수 없는 조합이다.
오전에 미팅을 마치고, 조지와 나, 그리고 한국 파트너사 섭외를 도와준 예전 동료 서대표님 (한국 남자), 이렇게 셋이서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내가 손을 씻고 나오니, 통유리 창을 마주 보는 가장 좋은 자리가 나를 위해 비워져 있었다. 나의 왼쪽에 한국 남성 서대표님, 오른쪽에 네덜란드 남성 조지가 앉았다.
그리고 근사한 요리들이 코스에 맞춰 서빙되기 시작했다.
서버 (server: 음식을 내어주고 설명도 해주시는 직원)는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고 미소가 친절한 여성이었다.
첫 번째 애피타이저가 나왔다. 가장 먼저 조지에게 음식을 내어주고 영어로 설명을 마친 후, 가운데의 나를 지나쳐서 서대표님에게 서빙,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앞에 음식을 놓은 후 한글 설명을 했다. 오케이.
두 번째 코스가 나왔다. 조지에게 먼저, 다시 나를 지나쳐서 서대표님, 그리고 내 순서로 음식이 놓였다.
응?
나는 친구들과 종종 유럽의 미슐랭 레스토랑을 간다. 별의 수가 많을수록 식사 경험이 예술의 경지다. 미슐랭 2 Star (별 두 개) 이상인 경우에는 서버의 수를 손님의 수에 맞추기도 한다. 세 명의 손님에게 세 명의 서버가 와서 동시에 정확하게 짜인 동작으로 근사하게 음식을 내어주면 마치 좋은 공연을 보는 것 같다.
서버가 테이블 당 한 명인 경우에는 오늘의 특별한 손님이 누구인지 물어서 그 사람 위주로 서빙을 하거나 (주로 생일이나 축하 자리), 일반적인 식사 자리에 성인 남녀가 함께 동석했다면 거의 100% 여성을 먼저 대접한다. 레이디 퍼스트.
약간 머쓱한 기분으로 웃으면서 여성 서버에게 농담하듯 물었다.
나: 오늘 이 자리 제가 마련한 거예요. 레이디 퍼스트 안 해주세요? 여기 다 제 친구들이에요. (웃음 웃음)
서버: 네? 아.. 아니 저는 여기 외국분이 귀한 손님인 줄 알고요.
나: 에이, 다 제 친구예요.
세 번째 코스, 네 번째 코스... 메인에서 디저트로 식사를 마칠 때까지 그녀는 소신 있게 서빙했다. 금발의 푸른 눈 서양 남자 먼저, 다음은 한국 남자, 그리고 나. 중간에 이 상황이 점점 코미디처럼 보이기 시작하자 조지가 말했다.
조지: 나 이거 뭔지 알아! 파란 눈 특혜 (Blue-eye privilige). 아시아에서 종종 그런다고들 하던데. 하하하.
계산을 마치자 동양과 서양의 두 남자가 나에게 거듭 고마움을 표현했고, 친절한 서버분은 셰프를 불러 기념 촬영도 해주었다. 나는 웃고 있었지만 내심 좀 아쉬웠다. 들키고 싶지 않은 내 나라의 뭔가를 들킨 기분이랄까.
일정을 마치고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가는 KLM 비행기에 올랐다. 조지는 홍콩에 들렀다 간다며 먼저 떠났다.
오늘 탑승한 비행기의 비즈니스 좌석은 5 열이다. 나의 좌석은 중간의 3열 좌측 창가 자리. 내 옆 복도 좌석에는 근엄한 표정의 한국 중년 남성분이 앉았다.
네덜란드 국적기이다 보니 더치(네덜란드인) 몇몇, 기타 유럽인들, 그리고 한국인 승객들이 더러 보였다.
탑승이 완료되자 키가 큰 금발의 남자 기장이 인사를 다니기 시작했다. 내 앞 2열의 외국인 승객들과 영어로 한참을 이야기하더니 3 열인 나와 한국 남성 승객 앞으로 왔다.
기장: 탑승을 환영합니다! Welcome on board!
나: 고마워요. Thank you! (웃으면서 다음 말 기다림)
기장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 없이 다음 4열과 5열로 가버렸다. 내 옆의 한국인 남성 승객이랑은 인사도 안 한다.
잠시 후 자신을 사무장으로 소개하는 다른 더치 남성이 뒤에서 등장했다. 그는 내 뒤 4열과 5열에 앉은 4인가족과 하하 호호 한참 인사를 나누었다. 안 궁금했지만 하도 시끄러워서 그들이 가족이고 아시아 여기저기를 다니다가 독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며, 제복을 입은 사람은 사무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금 지나자 해당 사무장이 다시 앞쪽에서 나타났다. 아까의 기장처럼 2열의 유럽인 승객들과 즐거운 대화를 한 후에, 내가 앉은 3열을 쓱 보더니 바로 몸을 돌려 조종칸 cockpit 쪽으로 가버렸다.
응?
바로 그 순간, 며칠 전 미슐랭 레스토랑의 해프닝이 미묘하게 오버랩됐다.
한국인은 금발의 파란 눈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대접해 주는데, 금발의 파란 눈들은 한국인을 노룩 패싱 (no look passing, 쳐다도 안보고 지나침) 하는구나.
순간 호기심이 솟구쳤다. 글로 써봐야겠다 싶었다. 웰컴 드링크를 나눠주는 승무원에게 나직이 부탁했다.
나: 이따가 이륙하고 시간 날 때요, 여기 사무장 좀 불러주세요. 물어볼 게 있어요.
비행기가 이륙하고 좌석 벨트 불이 꺼지자 곧 사무장이 프로페셔널하게 웃는 얼굴로 나타났다.
내가 조용한 곳으로 가서 얘기하자고 손짓을 하자 그가 비상구 부근으로 나를 안내했다.
나: 와줘서 고마워요. 제가 오늘 탑승과정을 지켜보면서 궁금하게 있어서요.
사무장: 뭐든지 물어보세요. 참, 저는 케이 (K. 가명)라고 해요. 오늘 사무장이죠. 뭘 도와드릴까요?
나는 우선 공손하게 나의 본업을 소개하고, 네덜란드에 9년째 거주 중이며 네덜란드에서 시작된 글로벌 회사에 다니면서 소수의 아시안 여성의 관점에서 관찰한고 느낀 점을 한국 블로그에 쓰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 나의 탑승 경험을 블로그에 쓰고 싶은데, 그의 행동에 대해 편하게 얘기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케이: 오우, 물론이죠. 어떤 질문인지 알겠어요. 그러나 절대 오해하지 마세요. 저는 모든 승객들을 환영해요. 아까는 비즈니스칸 뒤편 출입문을 점검하다 4-5열 승객들을 먼저 만나게 된 거고요, 다시 1열부터 인사를 시작했는데 이륙 전에 시간이 부족해서 다 못 마쳤네요. 하필 딱 3열만 빠뜨렸어요.
나: 아, 그런 거군요. 하하. 괜히 오해했어요. 음.. 그런데 아까 기장님은 왜 그랬을까요? 시간도 많았는데.
케이: 아... 네, 그건 제가 짐작인데, 아무래도 한국 승객분들이 저희랑 대화를 좀 피하는 느낌이 있다고 할까요? 영어가 편하지 않을 수도 있고...
(오호..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는 조금 더 솔직해지는 건가?)
나: 그런가요? 케이는 어때요? 한국 승객들한테 인사했다가 무안하거나 당황했던 적이 있어요?
케이: 아, 사실은 오늘 1열 승객이 한국 커플이신데, 아까 인사했거든요. 대화를 이어가려고 일부러 '네, 아니요'로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드리는데.. 남자분은 말씀을 안 하시고, 여자분은 계속 "yes yes" 하셔서 영어를 안 하시나 보다 하고 그냥 인사하고 지나왔어요. 그럴 때 좀 무안하죠.
(그러다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는 듯이 말투를 고치면서)
케이: 하지만 이거 하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우리 KLM은 승객의 안전이 최우선이고, 모든 승객분들을 환영하며, 성별, 인종을 가리지 않고 다양성과 포용성 (diversity and inclusiveness)를 회사의 가치로 삼고 있습니다. 오히려 여성분들과 성소수자분들을 더 우대한다는 역차별의 불평을 듣기도 하는걸요. 하하하
그러니까 살짝 억지를 넣어서 요약하자면, 1열의 한국인 승객들에게 시간차로 무안을 당한 기장과 사무장이 2열의 유럽인들과 즐거운 대화를 나눈 후, 다시 3열의 한국인 두 명 (나와 옆자리)을 보자 '얘네들도 영어 못할 거야. 굳이 힘 빼지 말자' 생각하고 휘릭 지나쳤다, 뭐 그런 스토리인 듯.
나는 MBTI가 I로 시작하는 내향인으로 어디 가서 모르는 사람들이랑 얘기하는 거 굳이 즐기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출항해서 우리나라 승객을 태우고 가는 항공기의 승무원들이 우리나라 사람을 대하는 서비스의 퀄리티가 다른 외국인들과 달라 보이는 것이 마뜩지 않았다.
외모가 주는 편견으로 더 잘해줄 필요도 없고 (서빙하던 여성분!), 비슷하게 생겼으니 한국인은 다들 영어를 못할 거라고 짐작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 (케이! 기분 별로였다구요)
여담으로, KLM의 다양성과 포용성 정책을 적극 홍보하던 케이에게 나의 사례를 들려주었다.
나: 몇 달 전, 암스테르담에서 홍콩으로 출장을 가는 길이었어요. KLM의 프리미엄 이코노미를 탔는데 10시간 넘는 장거리 비행이니까 혹시 슬리퍼가 있는지 승무원에게 물었죠. 있으면 좋고, 없다고 해도 그만이었어요. 그런데 그 승무원이 나를 보면서 그러더군요. "우리 문화에서는 기내에서 슬리퍼를 신지 않아. 호호호"
여기서 말하는 '우리 문화'는 뭐고, '너네 문화'랑은 어떻게 다른 걸까요? 그리고 오늘 여기 보니까 전 좌석에 슬리퍼 있는데요?
케이의 얼굴이 붉어졌다. 방금 KLM의 포용성(inclusiveness)에 대해 열변을 토한 직후가 아닌가.
케이: 아... 그 직원이 정말 잘못했네요. 대신 사과드려요. 아무래도 직원이 8천 명이나 되다 보니..
나: 괜찮아요. 저도 다양한 인종들이 모인 글로벌 기업에서 일하고 있고, 저도 뜻하지 않게 실수할 때가 많은 걸요. 다만 KLM 직원들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고 공유해줬으면 해요. 스토리에는 힘이 있잖아요. 계속 실수한 경험을 공유하고 하다 보면 조금씩 나아지지 않을까요.
케이: 반드시 그럴게요. 이번에 돌아가면 그다음 비행이 베이징, 그리고 콸라룸푸르예요. 직원들과 반드시 공유할게요. 고마워요.
오늘의 다짐: 집에 가면 마크 맨슨의 '신경 끄기의 기술'을 다시 읽어야겠다.
그래도 궁금한 건 못 참지.
대화를 마친 이후 비행기가 흔들릴 때마다, 기내식이 나올 때에도 계속 케이가 와서 과하고 친절하게 나의 편안함을 체크해주고 있다. 네네.. 알겠고요, 고마운데요, 모든 한국인에게 똑같이 잘해주면 더 고맙겠어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