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트로 떠나는 유럽여행

첫 번째 여행- 독일/하이델베르크 1

by 소심한 삘릴리


기억 속의 그녀 1


혹시, 이런 경험 있으세요? 무심코 길을 걷다 우연처럼 한때 사랑했던 여자와 마주친 경험이요. 두근두근 가슴이 뛰겠죠? 얼굴이 새빨간 석류처럼 붉어지고, 그녀와 애틋했던 사랑이 뭉실뭉실 떠오르기도 할 거고요.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면, 아차! 세월이 훌쩍 지났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순간적으로, 10년 아니 20년 전의 그녀를 거리에서 만났다고 착각을 한 거지요. 당연히 허망한 마음과 함께 그녀와의 아련한 추억이 날카롭게 마음을 할퀴고 떠난 것을 알게 되겠지요?

오늘, 박 교수가 이런 경험을 했습니다. 젊은 시절의 그녀를 닮은 낯선 여자로 인해, 가슴 철렁이고 새삼 세월의 무상함을 느꼈던 안타까운 경험 말입니다. 그것도 1년간 연구년을 보내려고 온,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요. 이렇게 늙은 총각의 가슴에 정통으로 꽂힌 그녀는 벌써 잊었다고 믿었던 그의 첫사랑이었습니다.


110813_118.JPG


햇살 좋은 가을 어느 날, 박 교수는 하이델베르크 마르크트 광장 카페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성을 바라보며 모처럼 만끽하는 늦은 오후의 여유에 살짝 들떠있었지요. 그때였습니다. 진한 가을 햇살이 맥주잔에 반사되며 하늘하늘한 스커트를 입은 여자가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살랑이는 바람 끝에 크리스천 디올의 자도르 향이 묻어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녀는 맞은편 테이블에 사뿐히 자리를 잡더군요. 자도르 향을 따라 무심코 그녀를 바라보던 그는 심장이 멎을 것 같은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세상에, 그녀는 오수진이었습니다. 그의 대학생활을 방황과 혼돈의 시간으로 몰아넣던 그녀, 오수진 말입니다. 같은 과 동기였던 그녀로 인해 그는 매일매일 천당과 지옥을 오갔고, 행복과 불행 사이에서 널을 뛰었으며,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녀를 마주한 것입니다.


대학시절, 그러니까 박 교수가 대학에 입학해 처음으로 그녀를 본 순간, 그의 눈에서 만화 캐릭터처럼 사랑의 하트가 뿅뿅 튀어나왔습니다. 사랑에 빠진 것이지요. 하지만 소심한 그는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왜냐고요? 그녀 주변에 남자가 한 둘이 아니었으니까요. 다행인 건, 학번이 나란했던 탓에 그녀와 수업을 같이 듣고, 실험도 함께 할 수 있었던 겁니다.


110813_147.JPG


그녀 이야기를 해 볼까요? 그녀 오수진은 반전 매력의 소유자였습니다. 예쁘고 도도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성격은 털털했고, 가끔 엉뚱한 행동을 해서 친구들을 웃기는 선수였습니다. 당연히 그녀 주변에는 어떻게든 그녀와 엮이려는 남자들이 줄을 섰고, 괜히 잘못 나섰다가 영영 그녀에게 외면당하는 남자들이 수두룩했습니다.

“나, 놀려고 대학 왔어. 엄마가 대학 가면 마음대로 놀아도 된다고 했거든.”

그랬습니다. 놀지 못하고 죽은 귀신이라도 붙었는지 그녀는 대학시절 내내 공부보다 노는 일에 빠져있었습니다. 툭하면 클럽으로 춤을 추러 가거나 배낭 하나 짊어지고 여행을 떠나기 일쑤였습니다. 연극반과 응원단에서 활동하느라 바빠 수업을 거의 빼먹는 처지였습니다.

노느라 바쁜 그녀의 뒷바라지는 그의 몫이었습니다. 물론, 자진해서 그가 맡은 일이지요. 대체 무슨 뒷바라지를 했냐고요? 그녀의 수업 대출해주기, 리포트 써주기, 시험공부를 위한 족보 작성해주기, 심지어 커닝 페이퍼 만들기까지 도맡았습니다. 그것뿐인가요? 그녀가 같은 과 동기 정우와 사귀기 시작했을 때도 그의 충성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그의 마음을, 사랑을 눈치챘다면 속없는 놈이라고 욕했을 겁니다. 그래도 그는 좋았습니다. 그녀의 남자로 남을 수 없다면, 그녀의 친구로라도 그녀 곁에 영원히 존재하고 싶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는 밤마다 쓴 소주를 마시며, 홀로 가슴을 치며 자문했습니다.


110813_189.JPG


“나는, 나는 왜 안 되는데?”

그녀에게 수없이 묻고 싶었던 이 말을 꿀꺽 삼키고 그는 남자 사람 친구로 그녀 곁에 남았습니다. 하늘이 도왔을까요? 그녀는 정우와 6개월 만에 헤어졌습니다. 잘 된 일이지요. 그는 시련의 상처를 보듬어주며 오빠처럼 키다리 아저씨처럼 그녀의 든든한 보디가드가 돼서 대학시절을 보냈습니다.

그가 그녀를 만나는 원칙은 간단했습니다. 그녀의 남자 친구들에 일절 간섭하지 않고 언급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녀가 종알종알 남자 친구 이야기를 떠들면 묵묵하게 들어주었습니다. 당연히 가슴이 너널너덜 헤질 것처럼 아팠지요. 그렇다고 표를 낼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냥 꾹 참고 속으로 진한 눈물만 흘렸습니다. 그래도 돌이켜보면, 그때가 참 행복한 시절이었습니다.

언제부턴가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노는 일도 시들해졌는지, 도서관에 틀어박혀 있는 날들이 늘어났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녀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가족의 생계가 어려워졌고, 취업이 절실했던 것입니다. 물론 자존심이 강했던 그녀는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씩씩한 얼굴로 도서관에 파묻혀 입사 준비를 하는 그녀에게 무언가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가끔 도서관으로 위문공연을 가서 따뜻한 밥을 사주는 일이 전부였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그들은 졸업을 했고, 그녀는 대기업 연구소 연구원이 되었습니다.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