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트로 떠나는 유럽여행

첫 번째 여행- 독일/ 하이델베르크 3

by 소심한 삘릴리

기억 속의 그녀 3


그는 이제라도 용기를 내서 그녀, 오수진과 마주하고 싶었습니다.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는데…… 아, 이건 또 무슨 경우랍니까. 듬직하니 잘생긴 남자가 그녀에게로 다가와 마주 앉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와 동시에 박 교수는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지금 그는 대학시절 오수진을 본 것입니다. 타임머신을 탄 것처럼 15년 전의 오수진과 마주한 박 교수는 젊은 오수진을 쏙 빼닮은 여자를 홀린 듯 바라보고 있었던 거죠. 그러니까 결론은 저 젊은 여자가 오수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때였습니다. 여자와 마주 앉았던 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박 교수에게로 다가왔습니다.

“아, 박 교수님. 벌써 와 계셨네요.”

박 교수는 비로소 남자의 존재를 인식했습니다. 그는 동료 윤 교수가 소개한 K사 하이델베르크 주재원 장준식이었습니다. 물설고 낯선 그의 하이델베르크 생활을 도와주겠다며 나온 고마운 젊은이지요.

“처음 뵙겠습니다. 장준식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제 아내고요.”

아, 오수진을 닮은 그녀와 동행이었다니, 왠지 박 교수의 마음이 슬쩍 설렙니다.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도 어립니다. 오수진을 추억할 수 있게 해 준 그녀가 새삼 고맙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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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만남의 어색함은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고 맥주를 마시며 자연스럽게 풀어졌습니다. 조잘조잘 재미있게 수다를 풀어내는 장준식의 아내 덕이었습니다. 그녀 역시 오수진처럼 예쁜 외모와 반대로 털털한 성격의 소유자 같았습니다. 맥주는 또 얼마나 잘 마시는지, 장준식이 '마누라 맥주 값 대느라 허리가 휜다'는 농담을 할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였습니다.

“교수님, 혹시 오수진 씨 아세요?”

하마터면 박 교수는 마시던 맥주를 내뿜을 뻔했습니다.

“어, 어떻게 오수진을……”

“엄머, 아시나 보다. 제 큰언닌데, 교수님이랑 같은 학교 출신이라 혹시나 했거든요.”

아, 그랬구나…… 박 교수는 그제야 퍼즐이 맞춰지듯 막연하나마 그림이 그려졌습니다. 동시에 오수진에 대한 반가움과 그리움, 미안함과 애틋함이 몽글몽글 피어올랐습니다. 수진이가 어떻게 지내는지, 갑자기 궁금해 미칠 것 같았습니다.

“예뻤어요. 아주 많이. 그러고 보니 언니랑 참 많이 닮았네요.”

박 교수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습니다. 그렁그렁 맺히려는 눈물을 겨우 털어내며 아무렇지 않은 척, 장준식 내외를 바라보았습니다. 눈치 없이 장준식이 끼어들었습니다.

“맞아요. 이 사람하고 처형이 13살이나 차이 나는데, 너무 닮았어요. 그래서 저도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다니까요.”

오수진의 미모가 여전하다는 말에 박 교수의 입가에 오빠 미소가 떠올랐습니다. 장준식은 들뜬 목소리로 그녀가 재미교포와 결혼했고, 보스턴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아, 분위기를 보니 그녀는 여전히 잘 사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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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우리 언니 학교 다닐 때는 어땠어요? 그때도 엉뚱했어요?”

“엉뚱하다니, 무슨 말인지……”

장준식의 아내가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아, 얼마 전에 우리 세 자매가 미국 언니네 집에서 만났는데…… 그때, 언니가 결혼식 날 비화를 터트려서 우리 자매들이 배꼽을 잡았거든요.”

“그게 뭔데요?”

“큰언니가, 결혼식 날 도망가려고 했었다는 거예요.”

오수진이 결혼식 날 도망을 가려고 했다고? 박 교수의 눈이 번쩍 뜨이며 가슴이 벌렁벌렁 뛰기 시작했습니다. 대체 오수진의 결혼식 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언니가 형부랑 선본 지 한 달 만에 결혼하려니까, 어떤 남자 얼굴이 자꾸 떠오르더래요. 친구라는 가면을 쓰고 마음으로 좋아했던 남자였대요. 고민 고민하다가 마지막 기회다, 하는 마음으로 그 남자한테 결혼식 날 아침에 미용실로 데리러 오라고 했대요. 여차하면 그 남자 손을 잡고 도망가려고요.”

“그, 그래서요?”

아, 이럴 수는 없는 겁니다. 박 교수의 가슴이 묵직해지며 호흡이 가빠졌습니다. 그는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애쓰며 장준식의 아내를 바라보았습니다.

“그 남자한테 보기 좋게 바람맞았다지 뭐예요? 당연히 도망가자는 말은 꺼내지도 못했죠. 하하하 교수님, 우리 큰언니 진짜 엉뚱하죠? 학교 다닐 때도 그랬어요?”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요? 지금 박 교수는 제 발등을 찍고, 제 가슴을 뜯어내며 통곡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 딱 죽고 싶은 마음입니다. 뭐가 그리 우스운지, 장준식 내외는 속없이 깔깔거리기만 합니다. 그들을 바라보는 그의 가슴이 소금물을 한 바가지 들이킨 것처럼 울렁울렁합니다. 그리고 어렴풋이 정우의 장례식 날, 오수진이 외계어처럼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왜, 너한테는 여자가 아니었을까?”

쓸쓸하게 멀어져 가던 그녀의 뒷모습을 떠올린 박 교수는 가슴이 메여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아, 내가 내 무덤을 팠구나. 깊은 한숨과 함께 박 교수는 꾸역꾸역 맥주를 들이켰습니다. 오늘따라 맥주 맛이 왜 이렇게 쓸까요. 정말이지 박 교수는 맥주잔에 코라도 박고 세상을 하직하고 싶은 기분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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