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트로 떠나는 유럽여행

첫 번째 여행- 독일/하이델베르크 2

by 소심한 삘릴리

기억 속의 그녀 2


그들이 다시 만난 건 그가 입대를 앞둔 어느 날, 정우의 장례식장에서였습니다. 갑작스러운 정우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고, 친구의 죽음이 드리운 암울한 그림자 아래, 장례식장에 모인 과 동기들은 말없이 술만 마셨습니다. 누구랄 것 없이 친구들은 슬슬 그녀의 눈치를 보았습니다.

“야, 오수진. 생전에 정우가 널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르지? 그 미친놈이 술만 마시면, 널 부르면서 울었어.”

“야. 벌써 끝난 사랑을 어쩌라고? 수진이 좋아하던 놈이 어디 한둘이냐?”

술 취한 친구들은 갑론을박 그녀를 안주삼아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아, 쪼잔한 놈들. 은근히 그녀에게 바쳤던 순정을 보상받고 싶어서겠지요. 그나저나 평소 같으면 대거리라도 했을 그녀가 그날은 얼굴이 빨개져서 쓴 소주만 들이켜더군요. 그러더니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겁니다. 그는 쏜살같이 그녀를 따라나섰습니다. 그녀를 데려다주어야 할 것 같았으니까요. 장례식장을 나온 그녀는 말없이 밤길을 걸었습니다. 술기운을 못 이기고 휘청거릴 때마다, 그는 그녀를 부축하려 했으나 뿌리치는 그녀의 손길이 완강했습니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요. 갑자기 그녀가 홱 뒤를 돌아보더니 따라오는 그를 향해 소리쳤습니다.

“나는 왜, 너한테는 여자가 아니었을까?”

번개를 맞은 듯 그의 머릿속이 멍했습니다. 외계어처럼 어려운 그녀의 말을 어떻게 통역해야 하나, 그녀의 목소리는 또 왜 이렇게 슬프게 느껴질까, 멍하니 갈피를 못 잡는 사이, 그녀는 택시를 잡아타고 휑하니 가버렸습니다. 역시, 만취했던 그는 그날 끝내 그녀의 언어를 해석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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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빛의 속도로 흘러갔습니다.

그 사이, 그는 두 가지 진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녀가 곁에 없으면 어떻게 살까, 그녀를 그리다 혹시 죽는 건 아닐까 마음 졸였는데, 그녀를 못 만나도 살아지더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 대한 그의 사랑이 좀처럼 식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 못 말리지요? 어쨌든 시간이 흘러, 그는 제대를 했고 유학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녀에게 전화가 온 것입니다. 전화를 받는 그의 손이 살짝 떨렸던 것 같습니다.

“나, 결혼해.”

세상에, 이런 날벼락이 또 어디 있을까요. 그녀가 그의 여자는 아니었지만, 연애도 아니고 결혼을 한다니,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더구나 선을 본지 한 달 만에 결혼을 한다는 겁니다. 더 기가 막힌 건 그의 입에서 자동응답기처럼 "축하해"라는 말이 흘러나온 것이요. 순간, 그는 축하 말을 건넨 자기 입을 꿰매버리고 싶었습니다. 이런 바보 같은 놈, 미친놈, 자신에게 욕이라도 해주고 싶었습니다.

“저기, 결혼식 날, 예식장까지 나 좀 태워다 줄 수 있니? 신부화장이 끝나는 시간에 미용실로 오면 되는데.”

“어, 어, 그러지 뭐.”

이건 또 무슨 시추에이션이랍니까. 얼떨결에 오케이를 하고 말았습니다. 전화를 끊은 그는 접시물에 코를 박고 죽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동시에 가슴속이 부글부글 용암처럼 들끓으며 그의 입에서 “나쁜 년” 하고, 욕이 튀어나왔습니다. 오직 그녀 곁에 남겠다는 일념으로 눌러썼던 가면을 벗어던져버리고 그는 자신의 속마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정은 핑계였고 비겁함의 상징이었던 것입니다. 대체, 친구가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그녀가 남의 여자가 되는 마당에요. 아아, 그는 순결한 웨딩드레스를 입고 다른 남자에게 가는 그녀를 지켜볼 자신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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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그는 그녀의 결혼식 날까지 고통의 지옥을 헤맸습니다. 그녀와 함께 했던 우정의 시간을 돌아보며 자신이 얼마나 용기 없는 겁쟁이였는지 가슴을 쥐어뜯으며 후회했습니다. 차라리 그녀와 커플이 돼서, 그녀의 입술을 훔쳤노라 떠들고 다녔던 정우 녀석이 눈물 나게 부러웠습니다. 더구나 그녀를 다른 남자에게 영영 보내는 일을 자진해서 해야 하다니…… 그는 미칠 것 같았습니다. 그녀를 보낼 자신이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으니까요.

궁하면 통한다고 할까요. 마침 기회가 왔습니다.

그녀의 결혼식 날 아침에 어머니가 복통을 일으킨 것입니다. 물론 심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동네 약국에서 약 사 먹으면 된다는 어머니를 태우고 병원 응급실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전화를 걸어 세상에서 가장 다급하고 미안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사정 이야기를 했지요.

“미안해. 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셔서 응급실이야. 네 결혼식에 못 갈 것 같아.”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비겁했지만 어쩔 수 없이 그는 첫사랑을 이렇게 모질게 떠나보냈습니다. 시련의 아픔으로 그의 유학생활은 음울했고, 시련의 상처 탓인지 15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아직 늙은 총각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3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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