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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심한 삘릴리 Nov 23. 2021

첫사랑 도둑

덴마크 코펜하겐

               첫사랑 도둑  -- 덴마크 코펜하겐     


  한나의 집을 나와 인어공주 동상으로 가는 버스를 탔어. 괜히 코펜하겐에 왔다고 후회하면서 말이야. 발걸음이 완전 천근만근이었어. 너도 알지? 내가 원래 ‘소탐대실’ 하잖아. 작은 것에 욕심부리다 큰 것을 놓칠 때가 많았지. 지금도 그런 것 같아. 세상엔 공짜가 없다는 진실을 발견한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나는 지금 버스에서 내렸고, 세상살이의 전의를 상실한 사람처럼 터덜터덜 인어공주 동상을 향해 가고 있어. 스피노자가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한 것처럼, 내 덴마크 여행이 종말을 향해 가더라도 오늘은 코펜하겐 구경을 해야 하니까.   

  사실, 코펜하겐 여행은 충동구매처럼 시작됐어. 너도 알지? 내 룸메이트 데보라. 대책 없이 오지랖 넓고, 푼수끼가 다분하지만 마음은 비단결인 스페인 친구 말이야. 데보라가 초대를 받았다며 코펜하겐에 함께 놀러 가자고 나를 부추겼지 뭐야. 혼자 가기 심심했던 거지. 부활절 방학에 딱히 갈 데가 없었던 나는 물가 비싼 덴마크에서 ‘숙박비’를 해결할 수 있다는 유혹에 홀라당 넘어가 데보라를 따라나섰어. 그렇게 지옥의 문으로 들어선 거지.   




  데보라를 초대한 친구 한나는 전형적인 북유럽 데니쉬 여자였어. 커다란 덩치에 짧은 커트 스타일이 살짝 보이쉬한 느낌이었어. 스페인어를 전공했고, 마드리드에서 공부할 때 데보라의 도움을 많이 받았나 봐. 오지라퍼 데보라가 얼마나 알뜰살뜰 한나를 보살폈을지 상상이 가더라.  

  그런데 말이야, 데보라를 따라 한나의 집으로 들어서는데, 오소소 소름이 돋듯 한기가 들었어. 집이 추웠냐고? 아니, 한나가 온몸으로 내뿜은 냉랭한 적대감 때문이었어. 데보라는 전혀 몰랐겠지만, 나는 단번에 느낄 수 있었지. 당황했지. 왜 초면인 나를 저렇게 못마땅한 눈으로 볼까? 내가 뭘 잘못했을까? 곰곰이 생각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한 게 없더라. 그런데 왜? 내 인상이 별로였나? 아니면 호, 혹시 한나가 인종차별주의자? 유색인종에게 적대감을 느끼는 인간인가, 하는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지. 


  한나는 교묘하게 나를 홀대했어. 분명히 데보라가 친구를 데려가겠다고 말했을 텐데, 나를 완전 불청객 취급하더라. 데보라에겐 포근한 이불을 주면서 내겐 거칠거칠한 담요 한 장만 주었고, 내가 샤워를 하고 나오자마자 욕실 청소를 대대적으로 하는 거야. 은근 기분 나쁘게 말이야. 함께 커피를 마실 때도 그랬어. 내가 분명히 에스프레소를 마시겠다고 했는데, 내 커피에 우유를 잔뜩 넣어주더라고. 

  티볼리 공원에 놀러 갔을 때도 그랬어. 한나는 공원을 돌아다니면서도 계속 데보라와 마드리드에서의 추억만 이야기했어. 공감대가 없는 나는 절대로 낄 수 없는 대화였지. 노골적으로 스페인어로 말하기도 했어. 오랜만에 모국어를 써서 그럴까? 데보라도 신나서 스페인어로 수다 삼매경에 빠져들더라. 나만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거지.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으면서도 내내 불편했어. 초대해준 답례로 내가 저녁을 사겠다고 하자, 각자 계산하자며 단칼에 내 호의를 무시하더라. 갑자기 천덕꾸러기로 전락한 신세가 서러워서 밤엔 잠이 안 왔어. 그래서 아침 일찍 일어나, 혼자 커피 한 잔만 겨우 마시고 집을 나온 거야.   




  너도 코펜하겐에 인어공주 동상이 있는 거 알지? 안데르센 동화 ‘인어공주’를 테마로 1913년에 조각가 에드바르트 에릭슨이 제작한 동상이야. 규모는 좀 실망스러워. 누군가 그러더라. 왜 인어공주 동상으로 전 세계 관광객들이 몰리는지 모르겠다고. 나도 자그마한 인어공주 동상을 보며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외로운 내 신세 같아서 가슴이 찡해지더라. 그래도 인어공주는, 같이 사진 찍겠다고 난리 치는 관광객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니 나보다 나아 보였어. 

  인어공주 동상을 지나, 천천히 산책하듯 돌길을 걸어 게피온 분수로 왔어. 시원한 물줄기를 바라보노라니 기분이 조금 나아지더라. 아말리엔보리 궁전을 구경하고 나왔을 때는 음울했던 기분을 떨쳐버릴 수 있었지. 내가 좀 단순하잖아. 배도 고파졌고. 버스를 타고 니하운 항구로 향했어. 코펜하겐에서 제일 아름다운 곳, 내가 정말 가고 싶었던 곳이지.       

  파스텔톤의 노랑, 주황, 초록, 하늘색 건물들이 눈부시게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주욱 늘어선 항구의 풍경은 정말 환상이었어. 한때 이곳은 싸구려 선술집이 즐비했던, 선원들이 왁자지껄 떠들던 서민적인 항구였지. 지금은 멋진 레스토랑들이 들어선 세계적인 관광명소가 됐지만. 나는 살짝 선술집 분위기가 나는 카페에 자리를 잡았어. 음식 맛이 좋았고, 진한 에스프레소도 정말 훌륭했지. 근데 여기서 친구들과 맥주를 마셨으면 더 좋았겠다 싶더라. 그런 생각이 들자 다시 우울해졌어. 아무리 내가 “혼자 다니겠다.”는 메모를 남기고 나왔지만, 전화는 고사하고 문자 한 통 없는 데보라한테 섭섭한 마음도 들고.      

  

  우울함을 털어버리려고 니하운 운하 크루즈를 탔어. 천천히 유람선을 타고 파스텔 톤의 아름다운 항구 경관과 코펜하겐 시내를 둘러보았지. 암스테르담보다 위도가 높아서 추울 줄 알았는데, 햇살이 좋아서 그런지 살랑살랑 부는 봄바람이 따뜻했어. 암스테르담의 운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물도 깨끗했고. 처음으로 코펜하겐으로 여행 오기 잘했다는 생각을 했어. 그렇게 날이 저물도록 코펜하겐을 쏘다녔어. 시청사를 둘러보고, 시청사 광장 근처에 있는 안데르센 동상에서 관광객처럼 기념사진도 찍고, 스트르외에서 윈도우쇼핑을 했지. 스트르외는 시청광장에서 콩겐스 광장까지 이어지는 1.2Km 거린데 보행자만 이용할 수 있는 곳이야. 오래된 건물을 개조한 부티크들이 아기자기하게 즐비하게 이어져 있어서 볼거리가 참 많았어. 거리에는 악사를 비롯해서 퍼포먼스를 하는 사람들도 많더라. 작은 축제를 보는 느낌이 었지. 




  그렇게 다리가 아프도록 돌아다니다 보니 날이 저물었어. 알지? 내가 원래 해 떨어지면 집에 들어가야 하는 집순이인 거. 습관대로 집에 가야 하는데, 한나와 마주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답답해졌어. 스트레스 때문에 머리가 다 아프더라.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한나네 집 벨을 눌렀어. 


  “와, 진주! 빨리 들어와. 같이 술 마시자.”


  얼굴이 발그레해진 데보라가 잔뜩 들떠서 나를 거실로 데려갔어.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거실엔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어. 빈 와인 병 하나가 뒹굴었고, 테킬라는 반쯤 비워졌고, 나초와 함께 맥주도 몇 병 놓여있더라. 한나의 눈이 게슴츠레 한 걸 보니 벌써 많이들 마신 것 같았어. 술기운 탓인지 한나의 눈매가 한결 부드러워 보이더라. 얼마나 다행이던지. 나는 맥주를 홀짝이며 안도의 숨을 쉬었어. 그렇게 몇 잔, 술이 더 오갔고, 술 취한 한나가 흥흥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데보라가 사이다 같은 질문을 날렸어.


  “한나, 진주한테 뭐 불만 있어? 너 답지 않게 진주한테 왜 심술을 부리고 그래?”


  와, 감동. 데보라도 한나의 이상 행동을 눈치채고 있었던 거야. 내가 불편할까 봐 모르는 척했던 거지. 순간 꾹꾹 눌러 참았던 서러움이 삐질삐질 눈물처럼 삐져나왔어. 나도 정말, 진심으로 한나가 왜 나한테 못되게 구는지 알고 싶었거든. 아무리 술 취했다지만 한나도 호락호락하지 않았어. 몇 번이나 내가 뭘? 하면서 시치미를 떼더라.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데보라가 아니지. 데보라가 좀 집요한 면이 있거든. 결국, 한나가 자백처럼 이유를 실토했는데, 그게 참… 허무하더라.  


  “너무 닮아서. 아닌 거 아는데, 진주가 내 첫사랑을 뺏어간 여자랑 너무 닮아서 나도 모르게 화가 났었어. 미안해.”


  한나는 눈물 콧물 범벅이 돼서, 그녀의 아픈 첫사랑을 털어놓았어. 그녀의 남자를 뺏어간 여자는 일본에서 유학 온 여자였대. 그냥 뺏어만 간 게 아니라 둘이 결혼까지 하고 일본으로 가버렸나 봐. 그러니 상처가 더 컸겠지. 오해는 풀렸지만 정말 허망하더라. 나랑 닮은 일본 여자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신기하고. 그렇게 우리는 화해하고 좋은 친구가 되기로 약속했어. 해피엔딩이었던 셈이지.      


  다음 날 아침, 나는 일찍 일어나서 술국을 끓였어. 내 친구 데보라와 새롭게 친구가 된 한나에게 나의 비상식량인 냉동건조 북엇국을 끓여준 거지. 근데 부엌으로 나온 한나가 이상했어. 자기 부엌을 함부로 쓴다고 막 화를 내는 거야. 당황한 나는 어쩔 줄 몰라 허둥거렸지. 그때, 데보라가 부엌으로 들어오며 소리쳤어.     

 

  “진주. 미안해. 한나가 어젯밤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아. 얘가 술 취하면 필름이 끊기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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