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소리에 잠을 깬 선주가 부스스 눈을 떴다. 잘 잤어? 나지막이 속삭이는 유준의 아침 인사가 말랑말랑 달콤했다. 아, 행복하다. 선주는 깎아놓은 밤톨처럼 잘생긴 남편을 바라보며, 이 남자랑 결혼하기 참 잘했다고, 정말 정말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유준이 “라면 물 끓일까?”라고 묻기 전까지는.
선주와 유준은 8년간의 긴긴 연애 끝에 결혼했다. 첫 만남부터 불꽃이 튀었고, 사랑이 너무 뜨겁게 타올라 모든 것을 태워버릴 뻔한 위기도 있었다. 연애가 길었던 만큼 우여곡절도 많았다. 가난한 연인이었기에, 그들의 연애는 늘 힘들었다.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서로의 처지를 측은해했고, 가끔은 지겨워도 했었다. 사는 일이 힘들 때는 결혼이 사치로 여겨져서 눈물을 쏟으며 이별을 고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헤어질 위기를 수없이 겪으면서도 그들이 마침내 결혼하기까지는 ‘유럽여행 적금’의 힘이 컸다.
대학 시절부터, 그들의 로망은 유럽여행이었다. ‘유럽’과 ‘여행’이라는 단어가 주는 막연한 설렘이 좋았다. 그래서 친구들처럼 배낭에 의지해, 훌쩍 유럽으로 떠나고 싶었으나, 팍팍한 현실이 그들의 발목을 잡았다. 유럽으로 가는 현실의 거리는 너무 멀었다. 늘 그렇듯 돈 때문이었다. 독하게 마음먹고 여행비를 벌기 위해 알바를 전전했지만 돈이 모이지 않았다. 어쩌다 돈이 좀 모일까 싶으면 독수리가 사냥감을 낚아채듯, 누군가가 가져갔다. 그렇게 돈과 함께 희망이 사라졌었다.
“우리 이번 달부터 적금 붓자. 각자 15만 원씩 5년 만기로, 어때?”
유준이 그동안 모은 돈을 아버지 병원비로 헌납하고, 쓰디쓴 소주를 들이켜고 있을 때, 선주가 ‘그들만의 유럽여행 적금’을 제안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중도해약 없이 적금을 붓고 적금이 만기 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조건 둘이서 유럽여행을 떠나자고 했다. 의기투합한 그들은 바로 은행으로 달려가 적금을 들었다. 굳세게 서로의 손을 잡고 약속도 했다. 적금이 끝나는 대로 결혼하고, 유럽으로 신혼여행을 가자고.
‘유럽여행 적금’의 위력은 대단했다. 시들어가던 그들의 사랑이 나날이 늘어가는 적금 액수와 함께 살아났고, 삶의 희망도 생겼다. 불쑥불쑥 찾아오는 사랑의 권태기도 적금의 힘으로 이겨냈다. 우리가 정말 결혼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도 적금통장을 바라보며 털어냈다.
적금 만기와 함께 그들은 결혼식을 기획했다. 유럽여행자금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그들은 결혼의 모든 것을 희생했다. 신혼집은 선주가 살던 오피스텔로 대처했고, 양가 합의로 예단이나 혼수는 생략했다. 예물은 물론이고 결혼반지도 없었다. 결혼식도 유준네 시골집 마당에서 ‘작은 결혼식’을 했다. 축의금을 내고 초대받지 못한 친척과 친구들에겐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선주와 유준은 ‘짠내’ 나는 결혼식을 거쳐 대망의 유럽여행길에 올랐다.
“아침부터 꼭 라면을 먹어야 해?”
선주는 와락 치솟는 짜증을 꾹꾹 눌러 담으며 유준을 흘겨봤다. 아무리 여행비를 아끼기 위해서라지만, 열흘째 컵라면이라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호텔 조식은 바라지도 않았다. 아침마다 의무처럼 먹어야 하는 컵라면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다. 유준이 컵라면을 고집하는 이유는 단 하나. 비용 때문이었다. 문제는 비용 절감이 온종일 계속되는 데 있었다. 여행 시간을 절약한다는 핑계로 점심은 무조건 샌드위치였다. 그는 레스토랑에 2시간이나 붙잡혀 있는 시간이 아깝다며, 샌드위치를 들고 다니며 유적지를 둘러보자고 했다. 저녁도 예외는 아니었다. 비싼 유럽 물가를 탓하며 값싼 피자리아 식당이나 터키 식당만 다녔다.
먹을 것뿐 아니라 잠자리도 구질구질했다. 파리에서는 지하철 종점에 내려서 30분이나 걸어야 하는 낡은 호텔을 예약해 놓더니, 이탈리아 로마와 베네치아에서는 유스호스텔을, 오스트리아 빈에서는 기차역 앞의 허름한 호텔을 숙소로 잡았다. 결혼을 앞두고 갑자기 바빠진 일을 처리하느라, 여행 준비를 유준에게 맡긴 것이 실수였다. 명색이 신혼여행인데, 아무리 경비가 빠듯해도 그렇지, 이건 아니었다. 선주는 유준이 예약한 숙소로 들어설 때마다 속에서 천불이 올라왔지만 참았다. 오랜 시간 오매불망 기다렸던 유럽여행을 망칠 수 없어서였다. 다행히, 잘츠부르크와 인스브루크의 호텔은 나쁘지 않았다. 특히 아기자기한 티롤 풍의 인스브루크 호텔은 그녀의 감성을 자극했다. 그런데 이렇게 예쁜 호텔에서 아침부터 라면이라니… 선주는 괜히 심술이 나서 입을 삐죽이며, 남편이 애정하는 라면을 거부했다.
“나, 오늘 아침은 커피 한 잔만 마실래.”
“어, 배고플 텐데… 그럼, 점심은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먹자. 티롤 음식 맛있대.”
정말?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자는 말 한마디에 선주의 마음이 스르륵 풀렸다. 기분까지 좋아져서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단순하기는 참. 유준은 허허 웃으며 선주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그렇게 인스브루크에서 하루가 시작됐다. 맛있는 점심을 먹을 생각에 선주의 마음이 급했다. 서둘러 준비를 마친 그들은 왕궁 교회를 둘러보고, 인스브루크 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시계탑에 올랐다. 눈부시게 파란 하늘 아래 황금 지붕을 비롯한 구시가지 건물들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구시가지를 빠져나온 그들은 하펠레칼슈피츠로 가는 등산 열차를 탔다. 정상으로 향하는 케이블카 안에서 발아래로 펼쳐지는 인스브루크 시내를 바라보며, 선주는 유준의 손을 꼭 잡았다. 보고만 있어도 행복한 이 풍경을 유준과 함께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 가슴 떨리게 행복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일어난 감동의 물결에 몸을 맡기며 선주는 유준과 결혼하기 잘했다고, 유럽으로 신혼여행 오기를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나른한 행복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다시, 구시가지로 돌아오자 작은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황금 지붕 앞 광장에서 티롤 지방 민속음식축제가 한창이었다. 처음 보는 맛깔스러운 음식들이 수두룩했다.
“와, 맛있겠는데?”
입맛을 다시던 유준이 갑자기 꼬치구이와 슈니첼을 샀다. 얼마나 동작이 빨랐던지, 말릴 틈도 없었다. 그와 동시에 햇살이 쏟아지는 레스토랑 야외테라스에서 점심을 즐기려던 선주의 꿈이 산산조각 났다. 몸 안에서 무언가가 스르르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며, 모든 것이 허망해졌다. 꾹꾹 눌러 참았던 설움이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이성을 잃은 그녀는 유준이 들고 온 음식들을 냅다 던져버리며 소리쳤다.
“그만하자. 구질구질한 여행, 너나 해!”
울컥 솟구치는 눈물을 참으며 선주는 광장을 빠져나갔다. 어? 왜 그래? 야, 선주야. 어디가? 당황한 유준의 목소리가 그녀를 따라왔다. 다급하게 유준이 그녀를 잡았다. 이거 놔! 선주는 유준을 뿌리치며 빠른 걸음으로 구시가지를 벗어났다. 아무래도 이 결혼,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어쩌자고 저런 짠돌이랑 결혼까지 했는지, 그녀는 자신이 한심했다. 물밀 듯 후회도 밀려왔다. 참고 참았던 눈물이 투두둑 흘렀다.
“선주야, 그러지 마.”
유준이 다급하게 그녀의 손을 낚아챘다. 버럭, 화를 내며 다시 그를 뿌리치려던 선주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의 손에 뭔가가 만져졌다. 작고 동그란 것. 반지였다.
“미안해. 여행비를 아껴서라도, 결혼반지는 꼭 해주고 싶었어.”
“으아앙. 이 바보야. 내가 원하는 건 반지가 아니란 말이야.”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며 선주는 그녀의 가난한 동지, 유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유준이 미웠다. 아니, 그의 지질한 모습 속에 보이는 그녀의 일부가 죽도록 미웠다. 유럽에서도 자유롭지 못한 그들의 가난이 징글징글하게 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