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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심한 삘릴리 May 17. 2022

나, 정말로 전생에 나라를 팔았을까?

모처럼 수경의 아침이 평온하다. 커피를 내리고, 통밀 호두빵에 무화과잼을 바르는 손길에도 기분 좋은 설렘이 묻어있다. 그녀의 입가로 잔잔한 미소가 피어난다. 시어머니의 부재가 가져다준 평화가 그녀를 살짝 들뜨게 한다.  비록 일주일 짜리 행복이지만, 그녀는 시어머니의 부재가 선물한 이 행복을 마음껏 누리고 싶다.

남편과 아들의 출근을 돕고, 아침 운동을 다녀와 음악을 들으며 빵과 커피로 아침을 즐기는, 어제와 다름없는 일상이 오늘따라 특별하게 느껴진다. 이런 날을 그냥 보낼 수는 없는 법. 수경은 밀린 숙제처럼 잔뜩 쌓여있는 번역 거리를 뒤로하고 발걸음 가볍게 집을 나선다.


  "내 나이 환갑에, 아직도 시집살이를 한다. 나, 너무 가엾지 않니?"

  "가엾지. 아무리 생각해도 너,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은 게 분명해. 그러니까 언제 끝날지 모를 시집살이를 지금까지 하는 거지. 안 그래? 하하하하." 

  "맞다. 그런 것 같아. 아하하하하."


  수경의 호출을 받고 뛰어나온 선주가 짓궂은 농담을 건네며 큰소리로 웃었다. 그녀를 따라 웃는 수경의 입가로 웃픈 미소가 스친다. 잠깐 억울한 생각도 들었다. 1년에 몇 번 있는 시댁 행사 때문에 스트레스받아서 못 살겠다고, 난리를 치는 세상에서 그녀의 삶은 매일매일이 시집살이라니... 어쩌자고 시댁에서 함께 살겠다는 결정을 겁도 없이 했는지... 제 발등을 찍고 싶은 심정이다.    


  "나 있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시집살이가 너무 지겹고 힘들어. 이젠 남편하고 결혼한 것도 후회돼..."  

  "어이구, 참 일찍도 후회한다. 다 늙어서 이혼이라도 하려고? 크크크크"


  나쁜 년! 누가 이혼한대? 수경은 그녀를 놀려대는 선주를 곱게 흘려본다. 미주알고주알 그녀가  속마음을 털어놓고, 위로를 받던 친구가 건네는 농담에 어쩐지 뼈가 있는 느낌이다. 하긴, 그녀의 시집살이를 처음부터 반대했던 친구였다. 수경이 스물다섯 어린 나이에 남편을 만나, 결혼을 반대하는 친정 엄마에게 등짝을 맞아가며 백일 만에 결혼을 강행하겠다고 했을 때, 선주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심각한 얼굴로 결혼을 다시 생각해보라고 충고했었다. 다른 건 다 극복할 수 있지만, 시댁에서 함께 사는 일은 아닌 것 같다고. 수경만큼 어렸던 그녀가 차분하게 말했었다.     


  "나도 너를 보면 답이 안 나와. 96세 되신 너희 시어머니가 건강하신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객관적으로 좋은 거겠지. 건강하게 잘 늙어가시니까. 어쩌면 우리 롤모델일 수도 있고. 문제는 친정 엄마가 아니라 시어머니라는데 있지만..."


  어느새 수경은 선주의 측은한 시선을 느낀다. 모처럼  시어머니의 부재가 가져온 자유를 즐기겠다고 나와서 또 시어머니 이야기를 하는 자신이 한심해서 잠시 우울해진다.

  선주는 100세 시대를 눈앞에서 경험하고 있는 수경에게 뭐라 할 말이 없다. 그녀도 안다. 수경의 시어머니가 객관적으로 좋은 분이라는 것을. 평생 자신을 부지런히 가꾸고, 자식들을 알뜰살뜰 보살피며 최고로 키워낸 분이라는 것을. 매일 규칙적으로 산책을 즐기고, 책을 읽고, 자식들을 따라 철철이 여행도 다니며 건강하게 노년을 즐기시는, 우리 시대의 모범 같은 분이라는 것을...  다만 그 좋은 분을 모시고 살아야 하는 친구의 고단함이 안쓰러울 뿐이다.


  "가끔, 우리 강 여사님이 시어머니가 아니라 친정엄마면 어떨까 상상해보거든... "

  "너희 시어머니, 자식들한테 지극 정성이셨다며? 네가 딸이라면, 너 일하는 동안 살림도 해주시지 않았을까?"

  "맞아. 그러셨을 거야. 며느리인 나는 막 부려먹으시면서, 딸들은 지금도 애지중지하시니까. 시누이네 집에 놀러 가셨다가도 밥시간 되면 우리 집으로 달려오셔. 그리고 원고 마감 때문에 헉헉거리는 며느리한테  빨리 밥 차리라고 성화를 하시지. 왜 시어머니들은 그러실까? 딸은 상전이고, 며느리는 하녀라는 이중잣대를 갖고 계실까?"

  "며느리가 하녀라는 건 옛말 아니야? 요즘은 며느리가 상전인 세상 같은데?"

  "그건 젊은 며느리들 얘기고. 나같이 늙은 며느리는 여전히 하녀지. 근데 좀 억울하다. 죽어라 시어머니 하녀 노릇 했는데, 며느리를 또 상전으로 모셔야 한다니..."

  "우리가 부모를 모시는 마지막 세대고, 자식에게 부양을 못 받는 첫 세대라잖아. 그나마 난 시부모를 안 모셔서 별 불만 없지만, 넌 많이 억울하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은 게 분명해. 하하하하하"


  선주와 수다가 길어질수록 수경의 가슴이 돌덩이를 눌러놓은 듯 무거워진다.  맛있게 먹던 명란 파스타가 잔뜩 뒤엉켜 체한 기분이다. 에잇!

  아들이 결혼하면 그녀도 시어머니가 될 거다. 물론 며느리와는 절대 같이 살지 않겠지만, 그녀처럼 평생 시부모를 모시며 힘들어할 일은 없겠지만, 그녀의 며느리 역시 고부 문제로 스트레스를 느끼겠지? 오늘 수경이 그랬듯이 친구를 만나 시어머니 흉을 실컷 보기도 할 거고. 수경이 아무리 며느리에게 잘한다고 해도 그녀 존재 자체는 이미 며느리에게 부담스러운 시어머닌 게 분명하니까. 아들을 둔 그녀는 며느리들이 죽어라 싫어하는 시금치족이 될 운명은 타고 난 거니까수경은 새삼 딸만 둘을 둔 선주가 부러워진다. 결혼한 큰딸은 물론이고, 이번에 대기업에 입사한 둘째 딸까지, 여전히 꿀이 뚝뚝 떨어지는 모녀관계를 유지하는 그녀가 부러워서 배까지 슬슬 아파온다. 세상은 참 불공평하다.   


  "너희 모녀는 여전히 알콩 달콩이지? 근데 말이야. 딸이 엄마랑 잘 지내면 참 보기 좋다고들 하면서, 왜 아들이 엄마랑 잘 지내면 도끼눈을 뜨고들 볼까? 마마보이 취급들 하잖아."

  "어머, 듣고 보니 그렇다~ 좋은 모녀 사이는 칭찬받지만, 좋은 모자 사이는 종종 비난의 대상이 되지. 우리 큰애도 지 신랑이 시어머니랑 살가울 때마다 삐죽거리더라고. 꼭 마마보이 같다면서 놀리기도 하고. 야! 근데 너도 그러잖아?"

  "어? 내가 뭘?"

  "니 남편, 시어머니 말이라면 껌벅 죽는 네 남편도 시어머니랑 사이좋잖아. 근데 넌 맨날 효자 남편이랑 사는 거 힘들다고 징징거렸잖아?"

  "아니, 효자랑 마마보이는 다르지!"

  "물론 다르지. 근데 며느리 입장에선 도긴개긴 아닐까?"

  "......"

  "왜 갑자기 침묵?"

  "갑자기 우울해서. 억울하기도 하고."

  "뭐, 그럴 것까지..."

  "아니야. 선주야. 나 정말,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은 게 분명한 것 같아. 그러니까 환갑이 되도록 시어머니 모시는 것도 모자라서 미래의 며느리에게는 미운털 잔뜩 박힌 시어머니가 될 테고..."

  "아냐. 너무 좌절하지 마. 너, 시부모님 모시면서 복 많이 지어놨잖아. 그러니까 너처럼 착한 며느리가 들어올 거야."


  커피를 마시던 선주가 위로하듯 수경의 손을 꼬옥 잡았다. 선주의 손이 참 따뜻하다. 37년 전, 수경에게 결혼을 다시 생각해 보라고 충고할 때도 그녀의 손은 이렇게 따뜻하고 다정했다. 수경은 어느새 나이 들어 옛날 어른들이 했던 덕담을 들려주는 선주를 말없이 바라본다. 세월 참 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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