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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심한 삘릴리 Aug 08. 2023

몰랐지? 나, 그런 사람이야

"새아가, 저 여자 말이야... "


강 여사의 시선이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던 여자로 향하는 순간, 불길한 예감이 수경을 스쳤다. 아니나 다를까, 강 여사가 여자를 힐끔거리며 입을 열었다. 수경은 얼른 검지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며 강여사의 말을 막으려 했지만, 한 발 늦고 말았다. 늘 그렇듯 강 여사의 말은 수경의 행동보다 빨랐고, 수경은 참사를 막지 못했다. 


"옷 입은 꼴이 저게 뭐냐? 배꼽이 다..."

"어, 어머니, 잠깐만요...."


당황한 수경이 얼른 강 여사의 손을 잡아끌며 도망치듯 1층 현관 밖으로 나갔다. 


"아이고 손목 아파라. 얘가 갑자기 왜 이래, 응?"


수경에게 끌려 나온 강 여사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녀를 흘겨봤다. 수경은 와락 올라오는 짜증을 억누르며, 얼른 손마이크를 만들어 강 여사의 귀에 대고 말했다.


"어머니, 그렇게 큰 목소리로 말씀하시면 다 들리잖아요. 좀 전에 어머니 목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아세요? 그 여자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도 보셨냐고요?"

"그래? 난, 너한테 살짝 말한 거였는데..."


늘 이런 식이었다. 귀가 안 들리는 강 여사는 안 그래도 크던 목소리가 더 커졌고, 상대를 배려하거나 조심하는 행동도 눈에 띄게 둔해졌다. 나이 들면서, 그녀의 노화가 점점 진행되면서, 강 여사는 살짝 몰지각한 할머니로 변했고, 그녀의 난청 상태도 점점 나빠졌다. 시어머니의 난청을 바라보는 수경의 시선도 복잡했다. 


처음에 수경은 보청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주위 사람을 특히 그녀를 힘들게 하는 강 여사가 미웠다. 소리를 못 듣는 시어머니 때문에 수경은 매일매일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러야 했고, 그런 수경을 남편이 오해하면서 부부싸움으로 이어질 때도 많았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나이 90을 넘기면서 강 여사는 다시 어린아이가 됐나 싶을 정도로 크고 작은 말썽을 피우곤 했는데, 뒷수습은 항상 수경의 몫이었다. 자꾸 반복되는 강 여사의 말썽 때문에 짜증이 난 수경이 잔소리를 늘어놓으며 목청을 높이면, 강 여사는 세상 불쌍한 표정으로 아들을 쳐다보곤 했다. 졸지에 수경은 노모를 구박하는 며느리가 됐고, 욱 하는 성격의 남편이 버럭 하면서 일이 커지곤 했었다. 


"네 시어머니 혹시 치매 걸리신 거 아닐까?"

"에이, 그건 아니야."

"우리 엄마 치매판정받았잖아. 근데 처음엔 별 증상 없으셨어. 오히려 너희 시어머니가 더 심각해 보이는 걸?"


수경의 하소연을 듣던 친구가 강 여사가 치매에 걸렸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언급했다. 그러고 보니 부쩍 강 여사의 건망증이 심해진 것 같아서 치매검사를 받았는데, 역시나 아니었다. 검사결과 강 여사는 귀가 안 들리는 것 말고는, 누구보다 똑똑하고 영리한 할머니라는 판정을 받았다.  


더 심각한 건, 강 여사 때문에 수경에게 생긴 이명이었다. 물론 수경의 이명이 꼭 강 여사 때문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심적으로 수경은 강 여사 탓을 했다. 강 여사가 만들어내는 거대한 소음과 그로 인한 스트레스가 이명의 원인일 것 같았다. 강 여사는 안 들리는 귀를 핑계로 텔레비전 볼륨을 점점 높였고, 수경은 귀가 찢어질 것 같은 소음을 2년 가까이 참고 지내야 했다. 참 이상했다. 강 여사는 온 가족이 모이는 주말에는 TV 볼륨을 그다지 높이지 않았지만, 수경의 남편과 아들이 없는 시간(당시 수경의 남편은 지방에서 근무 중이었고, 아들 윤재는 레지던트 수련 중이었다), 수경과 단 둘이 있는 시간에만 TV 볼륨을 높였다. 이명 진단을 받기 전까지, 수경은 귀가 찢어질 것 같은 소음과 그로 인한 스트레스를 참고 견디며 살았지만(시어머니가 어려워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이명 진단을 받고, 더는 이렇게 못 살겠다 싶었다.  


"어머니, 귀가 찢어질 것처럼 아파요. 볼륨 좀 줄일게요."


수경은 강 여사가 TV 볼륨을 높일 때마다, 리모컨을 찾아들고 소리를 줄여댔다. 강 여사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하늘 같은 시어머니가 TV를 보는데, 감히 며느리가 볼륨을 줄이다니, 세상 말세라는 표정으로 수경을 노려봤다. 수경은 얼굴에 철판을 깔고 대항했다. 계속 이렇게 살다 간 미쳐버릴 것 같았다. 수경을 째려보는 시어머니의 눈빛이 무서웠지만, 대항해야 했다. 그렇게 한 달쯤 실랑이를 벌인 끝에 수경은 어마어마한 TV 소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수경의 이명이 없어진 건 아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강 여사의 난청은 더 심해졌다. 이제 강 여사는 TV 볼륨을 제로로 해놓고 텔레비전을 볼 때가 많았다. 아무리 크게 해도 소리가 안 들려서였다. 수경은 강 여사를 위해 안방 텔레비전을 자막방송으로 세팅해 놓았고, 시어머니께 할 이야기는 화이트보드에 글을 쓰면서 전달하곤 했었다. 시누이의 아이디어로 시작한 화이트보드 사용은 수경에게 신세계였다. 펜으로 글을 써야 하는 일이 좀 귀찮기는 하지만 고래고래 목소리를 높이는 것보다 백 배쯤 좋았다. 의사전달이 정확해서 특히 좋았고, 중요한 이야기를 전할 때 더 좋았다.  


"새아가, 그냥 말로 해주면 안 될까?" 

"저도 그러고 싶은데, 어머니가 제 말을 잘 못 들으시잖아요." 

"그건 아는데, 칠판에 쓴 글을 읽는 게 싫어서 그래."  


어느 날, 강 여사가 쓸쓸한 얼굴로 화이트보드 대화의 거부의사를 밝혔다. 말 대신 글을 읽는 것이 싫다는 강 여사의 표정이 침울했다. 수경은 마음이 짠했다. 안 그래도 귀때문에 거의 모든 정상적인 대화가 끊긴 강 여사였다. 이제 수경은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 시어머니와 대화를 거의 하지 않았다. 아주 단편적이고 필요한 말들만 했다. "어머니, 식사하세요." "지금 밖이 너무 더우니까 나가지 마세요." "어머니, 분리수거 엉망으로 하셔서 제가 더 힘들어요. 그러니까 그냥 두세요. 제가 할게요." "저, 밖에 좀 다녀올게요." 등등. 

대신, 강 여사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주로 수경과 밥을 먹을 때마다, 강 여사는 자신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수경이 입장에서는 백 번도 더 들었을 이야기지만, 그녀는 묵묵히 들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아니 강 여사의 귀가 멀쩡할 때만 해도 수경은 이야기 중간중간에 추임새를 넣어주곤 했었다. "어머, 그래서요?"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요?" 이렇게 매너 좋은 추임새는 강 여사의 이야기를 더 즐겁고 재미있게 만들어주곤 했는데, 이제는 그것마저 불가능해졌다. 수경은 그녀의 추임새도 잘 듣지 못하는 시어머니가 가끔은 짠해서 마음이 아팠다.  

 

그날은 수경이 모처럼 남편과 저녁 약속이 있던 날이었다. 시어머니 저녁을 차려놓은 수경은 외출복을 갈아입고, 강 여사의 방으로 가며 잠시 갈등했다. 오늘의 외출을 화이트보드에 써서 알릴 것인가, 아니면 그냥 말로 전달할 것인가를. 긴 말도 아니니까 그냥 말로 하자고 생각한 수경은 시어머니 앞으로 다가갔다. 


"어머니. 저랑 윤재아범이랑 오늘 저녁에 외식해요."

"오, 그러냐?"

"어머니 저녁은 식탁에 차려놓았으니까, 이따가 드세요."

"그래. 새아기, 옷이 참 예쁘구나. 하하"


강 여사의 리액션이 커서 그랬을까, 수경은 성공적으로 대화를, 외출을 알리는 미션을 끝냈다고 생각했다. 역시 큰 목소리는 효과가 있었다. 수경의 패션까지 칭찬하는 걸 보니, 강 여사 기분도 아주 좋아 보였다.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수경은 살랑살랑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서려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강 여사에게로 갔다. 


"어머니, 지금까지 제가 뭐라고 했어요?"

"......" 

"지금, 제가 어디 간다고 했냐고요?" 

"......"


강 여사가 말똥말똥 수경을 쳐다봤다. 어이구 그럼 그렇지. 아니, 알아듣지도 못했으면서 리액션이 그렇게 좋을 건 또 뭐람! 다시 목청을 높여 오늘의 외출을 설명할 일이 갑갑해진 수경이 강 여사는 원망의 눈초리로 바라보려던 순간이었다. 강 여사가 빙그레 웃으며 느긋하고 우아하게 며느리를 향해 말펀치를 날렸다. 


"몰랐니? 나, 이런 사람이야."

 

아무리 말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 알아들을 수 없는 사람? 그래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사람? 강 여사의 얼굴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분명 슬픈 말인데, 이상하게 코믹했다. 그렇게 수경은 96살, 강 여사의 유머에 풋, 웃음이 터졌다. 며느리의 웃음을 따라 강 여사의 입가로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강 여사의 얼굴을 바라보는 수경의 코끝이 시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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