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페리고르-
21장 은서야, 울지 마

by 소심한 삘릴리

21. 은서야, 울지 마.

은서와 태주의 페리고르 여행은 허망하게 끝났다.

토요일 늦은 오후, 집 근처 도서관에서 모처럼 책을 읽으며 망중한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은서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진동 상태의 스마트폰이 현지의 위급한 상황을 알리듯 히스테릭하게 몸을 떨었다.

“민석아. 나야, 은서.”

은서의 전화였다. 그녀와 다시 연락이 닿고 나서 처음으로 받은 전화, 아니 어쩌면 은서가 내게 처음으로 건 전화일지 몰랐다. 그녀와 나 사이의 연락은 늘 일방적이었다. 내가 연락하고 그녀가 답하고.

군에 있을 때, 동아리 동기에게 그녀가 프랑스로 유학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가 태주와 헤어지고 한동안 방황하다가 프랑스로 떠났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내 입가로 히죽히죽 미소가 어렸다. 내 안에 숨어있던 작고 소심한 악마가 정체를 드러낸 기분이었다. 내가 가질 수 없던 것을, 녀석도 갖지 못했으니 비겼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공평한 세상에 새삼 감사하며 통쾌한 웃음을 흘렸다.

본의 아니게 태주와 은서를 연결해주고, 나는 우정을 잃었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허허거렸지만 이미 내 마음은 시련의 상처에 깊숙이 베인 상태였다. 당시 나는 스물한 살짜리 미숙한 남자였고, 사랑했던 여자가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기는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정도로 마음이 넓지 못했다. 태주에게 잘못이 없다는 걸 알지만, 그녀를 뺏긴 건 사실이었고, 상처였다. 그가 미웠다. 그래서 태주를 동아리로 데려왔듯이 동아리 밖으로 밀어냈다.

제대하고 복학하고 졸업하고 취직을 하는 동안 바람에 떠돌 듯 그의 소식을 들었다. 수학을 가르치는 참한 여자와 결혼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의 결혼식에 가지 않았다. 내 결혼식 청첩장도 보내지 않았다. 데면데면하기는 태주도 마찬가지였다. 은서와 헤어진 것이 내 탓인 듯, 동창회에서 마주칠 때마다 나를 원망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보다 못한 친구들이 서로 껄끄러워하는 우리를 화해시키려고 이런저런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었다.

“싸운 일이 있어야 화해를 하지.”

툭, 말을 던지던 그의 입가에 시니컬한 미소가 스쳤다. 밤톨을 깎아놓은 듯 반지르르 잘 생긴 녀석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 질끈 눈을 감고 그를 외면했다. 싸움을 피하는 파이터처럼 우리는 서로의 주위를 맴돌기만 할 뿐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갔고, 세월이 흘렀다.

한동안 은서는 베일에 싸인 존재였다. 아버지에게 등 떠밀려 유학을 간 그녀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사람처럼 이곳과 담을 쌓고 살았다. 프랑스는 지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우리에게 먼 나라였다. 군대와 제대, 졸업과 취직으로 바쁜 우리는 그곳에 있는 은서까지 세세하게 챙길 여유가 없었다. 그녀의 소식을 알려 준 건 승우 선배였다. 10년 넘게 프랑스 마르세유에 머물며 어렵게 박사학위를 딴 승우 선배가 귀국하고, 동아리 모임에 나와 그녀의 소식을 전했다. 그녀가 프랑스 남자와 결혼했다는 말에 우리는 의문의 1패를 맛보며 쓴 소주를 들이켰다. 몇 년이 지났고, 다시 승우 선배는 그녀가 이혼하고 파리에서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다는 고급 정보를 흘렸다. 그날, 잃어버린 보물을 찾은 듯 우리는 뿌듯한 미소를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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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파리로 출장을 갈 때마다, 그녀를 만났다. 우리는 샹젤리제 거리 카페에 앉아 노닥거리거나, 에펠탑에 올라 야경을 바라보며 하이네켄을 마셨다. 그녀가 좋아하는 알자스 지방 피자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고, 콩코르드 광장을 지나 튈르리 공원까지 산책을 즐기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녀의 남자가 아니었던 것에, 친구로 남은 것에 안도했다. 태주와 사이에서 ‘은서’가 금기어였던 것처럼. 은서를 만날 때 역시 ‘태주’는 우리 둘 사이의 금기어였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내게 서로의 근황을 묻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의 교집합처럼 존재하는 내가 가끔 무의미해 보일 정도였다.

금기를 깬 건 나였다. 암묵처럼 여겨졌던 금기를 깨고 입을 연 사람은 나였다. 오랜 망설임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동창에게 태주의 불행을 들었을 때, 아니 그보다 먼저 태주가 남프랑스 연구소에서 근무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침묵 속에서 나의 소심한 악마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저기, 태주가, 태주가 말이야…… 작년에 상처했대.”

퐁피두센터 근처 스타벅스에서였다. 그녀를 따라 퐁피두센터 전시장을 도는 내내 건성건성 그림들을 보며 어떻게 해야 자연스레 이야기를 꺼낼까 갈등했다. 그녀의 눈가가 사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랬구나.”

뜻밖에 침착했다. 조금 전까지 난해하기 짝이 없는 현대미술을 이야기하던 부산함이 사라진 목소리였다. 주눅이 들어 몸을 사리는 것 같기도 했다.

“교통사고였대. 한국에서 사고가 났는데 프랑스에 있는 태주한테 연락이 안 돼서, 임종도 못 봤나 봐……”

“사고라고? 어, 언제 사고를 당한 건데?”

은서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기분 나쁜 예감이 소름처럼 돋았다.

“아마 작년 6월이었을 걸?”

그녀의 얼굴이 절망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보는데, 울컥 화가 치밀었다. 무언가 불온한 기운이 내 가슴에 정확하게 꽂히는 것 같았다.

“어떻게…… 그날이었나 봐.”

은서가 고해성사하듯 태주의 전화를, 한밤중에 걸려온 그의 아내 전화를 받은 이야기를 고백했다. 운명처럼 태주와 재회하고, 무언가에 홀린 듯 그에게로 다가갔던 날의 기억을 털어놓았다. 또다시 그들에게 소외당한 기분이었다. 나는 죽어도 넘지 못하는 선을 태주는 참 쉽게 잘도 넘었다. 치졸한 열등감이 폭발했다. 견딜 수 없이 우울했다.

사실, 은서에게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확실하지 않지만, 태주가 아내를 잃은 충격으로 해리성 기억상실을 겪고 있는 것 같다고. 아직 아내가 죽은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정신과 치료도 거부하고 있어서 걱정이라고. 이렇게 친구의 불행을 가슴 아파하는 척하며, 그의 불행을 은근슬쩍 즐기고 싶었던 거다.

“너희 둘, 정말 인연이었나 보다.”

왜 갑자기 이런 말이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 파리에서 우연처럼 이루어진 그들의 재회에 과도할 정도로 의미를 부여했고, 그의 아내가 죽던 순간 태주를 차지하고 있었던 은서에게, 그로 인한 죄책감으로 몸을 떨고 있는 그녀에게 면죄부를 부여했다.

“자책하지 마. 그건 그냥 사고였을 뿐이야. 난, 어쩌면 태주 부인이 마지막 순간에 네게 녀석을 부탁했다는 느낌도 든다.”

태주와의 인연까지 부추긴 건, 내가 생각해도 너무했다. 지금처럼 자유롭게, 파리에 올 때마다 우정의 가면을 쓰고 그녀와 거짓 데이트라도 즐기고 싶은 내 마음을 숨기고, 넌지시 은서에게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라는 미소를 보냈다.

“넌, 여전히 우리 둘을 끔찍하게 위하는구나.”

뻣뻣하게 굳었던 그녀의 얼굴에 희미한 온기가 돌았다. 혼자만의 생각에서 빠져나온 은서는 입술을 살짝 달싹이며 내게 고마움을 전했다. 그렇게 그녀는 무모한 페리고르 여행을 계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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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나한테 거짓말한 거였니?”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태주 부인 죽었다며?”
“맞아.”

“근데, 쟤 왜 저래? 왜, 저 난리냐고?”

스마트폰 너머로 들리는 은서의 목소리가 당장 깨질 듯 날카로웠다.

“은서야, 너 지금 어디니? 너무 흥분한 것 같아, 진정 좀……”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니? 내가 지금까지 뭐 하고 다녔는지, 너 알아? 내가 아니 우리가 페리고르에서 어땠는지 네가 아느냐고?”

“아, 소리 좀 그만 지르라니까.”

얼굴이 빨개져서 소리 지르는 그녀가 보이는 것 같았다. 가벼운 흥분이 기분 좋게 심장을 자극했다.

“너, 알고 있었어? 태주 상태가 이상한 거 알고 있었냐고?”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태주가 울면서 전화하더라. 악을 쓰면서 지 마누라한테 보고 싶다고 전화했단 말이야. 말이 돼? 이게 말이 되냐고? 어떻게 죽은 사람한테 전화를 해?”

“외로워서 그럴 거야.”

“뭐?”
“태주 말이야, 외로워서 그러는 거니까, 네가 좀 잘해주라.”

스마트폰에서 하이소프라노 톤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성질을 이기지 못한 그녀의 설움이 폭발하는 것 같았다.

“울지 마, 은서야. 너무 낙심하지 마……”

울지 말고, 낙심하지 말라는 위로는 진심이었다. 나는 그녀가, 내 첫사랑 은서가 태주 때문에 우는 것을 원치 않는다. 스마트폰 너머로 은서의 슬픔이 짙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가슴이 저린다. 코끝이 찡해지는가 싶더니 눈 안에 고였던 물기가 뺨을 타고 주르르 흐른다. 제길, 도서관 벤치에서 수다를 떨던 여학생들이 흘끔거리며 나를 쳐다본다.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는데 후두두 빗방울이 떨어진다. 6월 장마가 시작되려나 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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