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나는 후회하지 않아
눈을 뜨자 곤히 잠든 태주의 얼굴이 보인다. 반듯한 이마를 따라 곧게 뻗은 코와 엘비스 프레슬리를 닮아 그녀를 설레게 했던 윤곽이 또렷한 입술. 은서는 가만히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춘다. 움찔하던 그의 얼굴에 주름이 몇 가닥 일더니 이내 잠잠해진다. 아직 선량한 아기처럼 꿈속을 헤매는가 보다. 은서는 태주와 함께 맞는 아침이 너무 행복해 코끝이 찡해진다.
“쉐리, 아직 페리고르에 있어?”
아침을 먹고 호텔 레스토랑을 나서는데 줄리앙에게 전화가 왔다. 어젯밤에 하일랜드 글랜코를 떠나 에든버러에 도착했단다. 레오는 아직 한밤중이고, 자신은 막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며 달뜬 목소리를 낸다. 착실하게 아빠 노릇을 하는 중임을 알리고 싶은 눈치다.
“남자 친구와 여행은 어때?”
줄리앙의 목소리에서 질투가 묻어 나온다. 아무리 쿨 한 척 해도 그녀의 연애가 못마땅한가 보다. 더구나 가족이 세상의 전부였던 그녀가 가족여행을 팽개쳤으니 충격이 이만저만 아닐 테다. 갓 볶은 커피 향처럼 고소한 쾌감이 번진다. 그녀는 이 순간을 오래도록 즐기고 싶다. 그동안 줄리앙의 바람기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와 상처가 어땠는지, 그로 인해 그녀가 헤맨 지옥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하나하나 알려주고 그에게도 똑같이 갚아 주고 싶은 충동이 인다. 은서는 친구에게 연애사를 고백하듯 들뜬 목소리로 태주와의 행복을 이야기한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만 익숙했지, 숨기는 방법을 모르는 줄리앙은 갑작스러운 그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다. 순진한 복서처럼 그녀가 휘두른 펀치를 맞고 저만치 나가떨어진다. 그래서일까, 그동안 당한 설움을 돌려주겠다는 바람은 어느새 사라지고 아이폰 너머로 병든 강아지처럼 끙끙거리는 줄리앙에게 슬쩍 미안해진다.
은서는 태주의 차를 몰고 사를라로 가는 동안에도 줄리앙을 떠올린다. 아몬드 토핑이 된 아이스크림을 머금은 듯 고소하면서 달콤하다. 전남편에게 통쾌한 복수의 펀치를 날리고, 사랑의 도피를 떠나는 행복한 여자가 된 기분이 이럴까. 그녀는 태주라는 종착역을 향해 흘러온 자신의 인생을 회상하며, 지금껏 살아온 인생을 후회하지 않기로 한다. 아니. 나는 절대로 후회하지 않아. 내 인생이 그를 찾아가는 여정이었으니까. 저절로 터져 나오는 기쁨을 억누를 길 없는 은서는 마음을 담은 노래,‘Non, je ne regrette rien’을 작은 소리로 끝없이 부른다. 그녀의 노래를 듣는 태주의 표정이 나른하다. 은서는 태주를 흘끔거리며 잔 다르크처럼 야무진 미소를 짓는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와, 오늘이 사를라 장날이네.”
사를라의 아침 시장이 활기로 가득하다. 주차장을 나선 두 사람은 플라스 들라 리베르테, 자유 광장으로 향한다. 태주의 손을 꼭 잡고 걷는 그녀의 가슴이 소풍 나온 어린아이처럼 설렌다. 사를라는 와인 마을 생떼밀리옹과 분위기가 비슷하면서 다른 느낌이다. 오래된 석조건물은 예쁘고 앙증맞은 꽃으로 장식했고, 거리는 상인들이 쳐놓은 색색의 천막들로 알록달록 화려하다. 은서는 태주의 팔짱을 끼고 옷가게와 신발가게, 스카프와 식탁보를 파는 가게를 둘러본다. 시장 물건이라 그런지 구경하기는 좋아도 살만한 것은 별로 없다.
은서의 마음이 바빠진다. 페리고르까지 와서 싸구려 올리브 절임이나 향신료를 사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은데, 작정이라도 한 듯 태주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진다. 빨리빨리 여행이 싫다는 그녀를 위한 배려인가 보다. 두 사람은 느린 걸음으로 올리브 절임과 향신료 가게를 지나 전기구이 통닭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푸드 트럭, 빠에야와 해산물 요리를 파는 가게를 구경한다. 성당 골목으로 꺾어지자 호두와 아몬드가 잔뜩 쌓인 가게, 맛있는 빵과 과자를 잔뜩 구워놓은 가게가 보인다. 싱싱한 채소와 과일가게의 행렬도 이어진다. 고소한 냄새와 함께 홈메이드 치즈를 파는 상점도 나온다.
길모퉁이를 돌아서자, 드디어 송로버섯과 푸아그라를 전문으로 파는 부티크가 보인다. 반가운 마음에 은서는 사냥감을 발견한 매처럼 쏜살같이 매장으로 들어간다. 태주의 원기보충을 위해 최고급 송로버섯을 사고 싶어서다. 그런데 매장에 들어서자, 줄리앙이 좋아하는 푸아그라부터 눈에 들어온다. 습관의 힘은 참 무섭다. 은서는 전남편의 취향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자신이 싫어진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그녀는 종업원이 권해준 최고급 푸아그라를 주문하며, 자신을 변명한다. 이 푸아그라는 전남편이 아니라 내 아들, 레오 아빠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이제, 태주를 위해 송로버섯을 살 차례다. 최고의 제품을 사고 싶은 그녀의 마음과 달리 종업원이 권해주는 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겉으로는 친절해도 속으로는 그녀를 뜨내기 관광객 취급하는 종업원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은서는 평소보다 까탈을 부리며 깐깐하게 송로버섯을 고른다. 송로버섯을 넣은 튀르프 오일을 고를 때는 신경이 곤두서서 머리가 다 지끈거린다. 슬쩍 태주를 보니 지루한 얼굴에 피곤이 가득하다. 그의 안색이 푸른 달빛처럼 창백해 보인다. 아무래도 그의 손을 잡고 나서려던 갤러리 투어는 포기해야 할 것 같다.
“힘들지? 나, 갤러리 좀 둘러보고 올 테니까 저기 성당에서 기다릴래?”
쇼핑을 마친 은서가 태주에게 양해를 구한다. 카페를 싫어하는 그를 위한 배려가 녹아있는 제안이다. 착한 아이처럼 태주가 생 사세르도 대성당으로 향한다. 은서는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갤러리 골목으로 몸을 돌린다.
사를라 갤러리는 이렌느가 말해준 페리고르 여행의 마지막 볼거리다. 그녀의 직업을 배려한 조언이기도 했다. 서남부 프랑스 지방 경치를 담은 수채화와 유화는 물론이고, 화가의 마음이 담긴 추상화들이 걸린 갤러리는 그 자체가 하나의 그림이다. 갤러리 골목을 걸으며 그녀는 태주와 함께 할 미래를 그려본다. 아직 서툴고 어색하지만 마음은 따뜻하고 편안할 것 같은 미래를. 이런, 벌써 점심시간이 다 됐다. 은서는 조만간 문을 닫을 예정인 갤러리를 눈여겨본다. 잘하면 좋은 조건으로 인수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주인의 명함을 챙긴 그녀는 서둘러 갤러리를 나선다. 몸도 성치 않은 태주를 너무 오랫동안 혼자 있게 했다.
부지런히 생 사세르도 대성당을 향해 걷던 은서가 급브레이크를 밟은 스포츠카처럼 요란하게 멈춰 선다. 웅성거리는 인파 사이로 보이는 남자, 돌바닥에 고꾸라져 있는 남자가 꼭 태주 같다. 옐로우와 블루가 섞인 체크남방에 화이트 면바지. 태주가 틀림없다. 성당에서 기다리겠다던 그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을까.
“태주야.”
그녀가 인파를 뚫고 그를 향해 갈 때였다.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그가 누군가를 부르며 달리기 시작한다. 눈은 벌써 초점을 잃었다. 아렌느 공원에서 마주쳤을 때와 같은 두려운 공포가 스친다. 꾸물거릴 시간이 없다. 어서 그를 잡아야 한다. 은서도 그를 따라 달리기 시작한다. 중심을 잃은 태주는 그러나 허적허적 잘도 달린다. 은서도 이를 악물고 그를 따라 뛴다. 추격 장면을 찍는 액션배우처럼 그를 놓치지 않으려고 속도를 높인다. 불안전 협심증 환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태주는 경주마처럼 빠르게 잘도 달린다. 어제 병원에서 심장에 무리를 주는 운동은 절대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는데, 저러다 잘못되면 어떡하나, 왈칵 솟구치는 걱정으로 그녀의 마음이 무거워진다. 어느새 그의 날쌘 뒷모습이 골목으로 꺾어진다.
태주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불안해진 그녀가 달리기 속도를 더 높이려다가 울퉁불퉁한 돌바닥을 헛디딘다. 발목이 꺾이며 비명과 함께 그녀가 앞으로 고꾸라진다. 쇼핑백에서 요동을 치던 물건들이 쏟아져 깨진다. 튀르프 올리브 오일이 깨진 병 사이로 흘러내린다. 가까스로 일어난 은서는 서둘러 쇼핑백을 수습한다. 어서, 태주에게 가야 한다. 절룩거리며 그녀가 골목으로 꺾어진다.
“여보. 나야. 나,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 미치도록 당신이 그립고, 죽을 것처럼 당신이 보고 싶다고. 알아들어? 내가 잘못했어. 다, 다, 다 내가 잘못했어. 내가 지금 갈게. 당장. 당신한테로 당장 갈게.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은서의 머리카락이 쭈뼛 선다. 공포영화의 클라이맥스를 보는 것 같다. 발진이 일 듯 소름이 돋는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도무지 이해 가지 않는다. 아니, 이해할 수 없다. 태주가 왜 저기서 저러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녀는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 같은 충격에 사로잡혀, 피 울음을 토하며 아내에게 전화하는 태주를 바라본다. 스르르 다리에 힘이 풀린다. 녹아내리는 촛농처럼 온몸의 힘이 빠져나간다.
사랑이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난 불청객에게 뒤통수를 세게 맞았다. 너무 치명적이라 몸을 가눌 수 없다. 겨우 불행의 망토를 벗고, 행복을 입으려 했는데 그마저도 빼앗겼다. 발가벗겨져 비천한 삶으로 내쫓긴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고 지워진 거위가 된다. 꽁꽁 몸을 묶이고, 강제로 입을 벌린 채 꾸역꾸역 쏟아지는 먹이를 먹어야 하는 가엾은 거위. 간이 바람을 넣은 풍선처럼 거대하게 불어나 마침내 온몸의 기능이 서서히 마비되며 죽음에 이르는 거위가 된다. 비대해진 간을 잔인하게 뽑히고 텅 빈 가슴만 남은 거위가 되어 풀썩 무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