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페리고르-
19장 사를라의 아침 시장

by 소심한 삘릴리

19. 사를라의 아침 시장

노곤한 아침 햇살 사이로 새들의 재잘거림이 들린다. 구슬픈 산비둘기 울음소리도 이어진다. 그 소리에 눈을 뜬 태주가 나른함을 털어내듯 기지개를 켠다. 빠르고 경쾌하게 소프라노 톤으로 아침을 여는 새들의 지저귐 사이로 느리게, 느리게 삶을 읊조리는 산비둘기 울음소리가 정겹다. 아내는 그 울음을 좋아했다. 우수에 젖은 녀석의 노랫소리에 반해서 항상 창문 앞에 쌀을 뿌려놓곤 했었다. 프로방스 라이프에 적응하지 못해 힘들어하면서도 녀석의 밥을 챙겨주는 일은 잊지 않았다. 이런, 또 아내 생각을 하고 말았다. 태주는 괜히 은서에게 미안해져서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몸은 좀 어때?”

은서가 샤워가운을 여미며 다가온다. 은은한 라벤더 향이 그의 코끝을 스친다. 보랏빛 향기가 위험한 거래처럼 아찔하다. 마시던 우유를 엎지른 아이처럼 허둥거리는 그의 목에 은서가 팔을 두르고 입을 맞춘다. 브라우니 한 조각을 입에 넣은 것 같은 달콤함이 온몸으로 퍼진다. 무심코 떠올렸던 아내의 기억이 미안해서 그녀와 눈을 맞추지 못하겠다.

“배고프다. 아침 먹자.”

1층 레스토랑으로 들어서자, 호텔 주인이 태주를 반긴다. 몸은 괜찮은지, 더 아픈 데는 없는지를 걱정스럽게 묻더니, 자기도 심장 쇼크로 고생한 적 있다며 수다스레 알아듣지도 못할 프랑스 말을 쏟아낸다.

“자, 마음껏 먹어요. 건강해진 기념으로 오늘 아침은 서비습니다.”

후한 시골인심에 감동한 은서가 호텔 주인을 와락 끌어안고 볼 키스를 한다. 감동의 비주를 하는 두 사람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그녀의 몸에 스며든 오래된 프랑스식 습관이, 태주는 여전히 어색하다. 아침을 먹는 동안 그녀의 얼굴에 화사한 웃음이 가득하다. 그녀의 웃음을 따라 그의 마음에도 미소가 스민다. 오늘은 좋은 일만 생길 것 같은 기분 좋은 예감이 든다.

레스토랑을 나서는데, 그녀의 아이폰이 울린다. 전화를 받는 그녀의 프랑스어가 평소보다 빠르고 경쾌하다. 전남편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태주는 서둘러 자리를 피한다. 등 뒤로 소프라노 가수 같은 그녀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어색함을 감추려는 사람처럼 그는 얼른 방으로 올라와 짐을 챙긴다. 흩어져 있던 물건들을 가방에 담는 그의 손길이 사르르 미세하게 떨린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묘한 불안이 그를 짓누른다. 여행 내내 아내의 그림자를 느끼듯, 통화하는 그녀 앞에 전남편의 실루엣이 어른거린다. 분명 그녀와 단둘이 나선 여행이었는데, 그를 따라나선 그림자들이 그를 몰아세우고 있다. 태주는 도리질하듯 고개를 흔들며 가방을 잠근다. 아침에 너무 여유를 부린 것 같다. 사를라로 가려면 빨리 서둘러야 한다.

“어제, 왜 아팠는지 알지?”

체크아웃하고 호텔을 나서는데, 은서가 당돌한 눈빛으로 묻는다. 순간, 태주의 머릿속이 하얘진다. 그의 심장을 움켜쥐고 흡혈귀처럼 뜯고 할퀸 원흉이 누구인지, 무엇이었는지,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워도 어렴풋이 그 정체를 알 것 같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됐는지, 지금이라도 바로잡아야 하건만, 그는 여전히 책임지는 일이 두려운 겁쟁이처럼 진실을 외면하고 있다. 그녀에게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할까……

“여행을 너무 전투하듯이 해서 그래. 그러니까, 오늘은 내 스타일로 여행하자.”

은서의 결론이 명쾌하다. 차라리 잘됐다. 태주가 힘없이 미소를 짓자, 은서는 떼쓰는 아이를 능숙하게 다루는 보모처럼 태주의 손에서 자동차 키를 가져간다. 말랑말랑하고 따뜻하게 스치던 손가락 끝의 감촉이 아쉬운 여운으로 남는다. 그를 걱정하는 마음이 어슴푸레 전해진다.

사를라로 가는 동안, 은서가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 ‘아니요, 난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Non, je ne regrette rien)’을 작은 소리로 부른다. 하필이면 아내가 좋아하던 노래다. 아내와 함께 마리옹 꼬티아르가 주연한 영화 <라 비 앙 로즈>를 보던 기억이 그를 스친다. 작곡가가 이 노래를 처음 들려주었을 때, 에디트 피아프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바로 내 노래야.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 내 인생 같은 노래야.”라고 절규하며 눈물을 글썽이던 장면이 생각난다. 그날 이후, 아내는 음치를 겨우 벗어난 노래 솜씨로 가사도 모른 채 툭하면 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아내가 서운해할까 말은 못 했으나 소음 같은 아내의 노래를 듣는 일은 고역이었다.

은서가 부르는 샹송은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마시멜로처럼 달콤하다. 그녀를 사랑하기 시작한 것도 저 노랫소리 때문이었다. 그런데 촉촉한 그녀의 노래를 듣는데 왜 자꾸 아내의 노랫소리가, 그릇 깨지는 소리에 음정과 박자마저 엉망인 아내의 노래가 그리워지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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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처음부터 만만했다. 은서에게 충성을 맹세한 군인 같았던 그는 아내에게 무심한 폭군이 되었다. 은서를 위해 약을 사던 그는 감기에 걸린 아내에게 “여자가 아프다고 누워있는 집구석은 들어오기도 싫다”며 신경질을 부렸다. 아픈 아내 앞에서 자기 건강관리도 못 하느냐며 화를 내고 찬바람을 일으켰다. 아내가 방학 때 아이를 데리고 해외 연수를 가겠다는 것도 못마땅해하며 막아섰다. 일하는 아내를 위해 집안일을 돕지도 않았다. 아내는 남편 눈치를 보느라 가사도우미도 못 부르고 주말이면 집안일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아내는 또 집안에 가구를 들이는 일과 가전제품을 사는 일은 물론이고, 그의 옷을 사는 일까지 태주와 의논해야 했다. 물론 그가 반대하면 아내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순종적인 아내를 길들이는 일은 쉬웠고, 태주는 그런 아내가 편하면서도 따분했다. 너무 쉬운 상대라 매력이 없었다. 머리는 착한 아내를 고맙게 여겼으나, 가슴은 아내에 대한 불만과 흉 거리로 가득했다. 아내가 무엇을 해도 못마땅했고, 화풀이 상대로도 만만했다. 가슴에 남은 사랑이 없다는 핑계로 아내를 사랑하지 않고, 존중하지 않았으며, 단물 빠진 껌처럼 함부로 대했던 그는 은서에게 어떤 남자였던가. 은서와 살았더라면 그의 결혼생활은 어땠을까.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와, 오늘이 사를라 장날이네.”

주차장에 차를 세운 은서가 들뜬 목소리로 환호한다. 구시가지로 향하는 그들의 발걸음이 가볍다. 중세의 건축양식을 그대로 간직한 사를라는 장터의 열기로 가득하다. 오래된 석조건물은 예쁘고 앙증맞은 꽃으로 장식했고, 거리는 상인들이 세워놓은 색색의 천막들로 알록달록 화려하다. 태주는 은서의 손을 잡고 옷가게와 신발가게, 아름다운 스카프와 식탁보를 파는 가게를 둘러본다. 오늘만큼은 천천히 여행하자는 마음으로 그의 걸음이 느려진다. 대성당으로 향하는 길에는 올리브 절임과 각종 향신료 가게, 전기구이 통닭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푸드 트럭, 빠에야와 해산물 요리를 파는 가게가 이어진다. 성당 골목으로 꺾어지자 호두와 아몬드가 잔뜩 쌓인 가게, 맛있는 빵과 과자를 잔뜩 구워놓은 가게가 보인다. 싱싱한 채소와 과일가게의 행렬도 이어진다. 고소한 냄새와 함께 홈메이드 치즈를 파는 가게도 나온다. 길모퉁이를 돌아서자, 고급스러운 부티크들이 당당한 위용을 뽐내며 서 있다. 송로버섯과 푸아그라를 전문으로 파는 상점들이다.

“페리고르까지 왔으니 푸아그라랑 송로버섯은 사야겠지?”

건성건성 시장 구경을 하던 은서가 반가운 친구를 발견한 사람처럼 환하게 웃는다. 포르르 부티크로 들어가는 그녀에게 이끌려 안으로 들어온 태주는 럭셔리한 분위기에 그만 위축당하고 만다. 제길, 이런 곳은 딱 질색이다.

“봉주르”

단정한 유니폼을 입은 종업원이 다가오자, 은서가 당당한 얼굴로 진열장에 있는 제품들을 보여 달라고 요구한다. 종업원이 먼저 고급 포도주와 치즈를 보여준다. 그녀의 표정이 시들하다. 원하는 상품이 없는 눈치다. 그녀의 관심이 푸아그라로 향한다. 곧 최고급 제품을 골라 든다. 종업원이 권해준 제품들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하자를 잡아내는 시험관처럼 살펴본 다음에 고른 상품이다. 송로버섯과 송로버섯이 든 튀르프 오일을 고를 때는 더 깐깐하게 군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쇼핑은 그의 적성에 맞지 않는다. 쇼핑하는 은서를 참아내고 기다리는 일은 정말 힘들다. 그녀의 쇼핑은 기다림의 시간이 한계에 다다랐다고 느낄 무렵이 돼서야 끝난다.

드디어 최고급 제품을 골라든 그녀의 입가에 승자의 미소가 번진다. 그런데 거만한 몸짓으로 지갑을 열고 카드를 꺼내는 그녀가 우주에서 온 생명체처럼 낯설어 보인다. 여행 첫날부터 그를 짓누르던 바윗덩이가 다시 몸을 굴리며 요란하게 작동을 시작하는 것 같다. 태주는 새삼 소박한 아내의 소심한 궁상이 그리워진다. 아내였다면 이런 곳에 성큼 들어서지 못했을 것이다. 돈 몇 푼 아끼려고 제철 무화과 대신 냉동 무화과를 사고, 좋아하는 올리브 절임을 사면서도 몇 번을 망설이고, 그가 인심 쓰듯 사주는 아이스크림 하나에도 행복해하며 아기처럼 방실방실 웃던 여자니까. 구경삼아 이런 고급 부티크에 들어왔어도 어마어마한 가격에 놀란 토끼 눈이 돼서, 어서 나가자고 그의 손을 잡아끌 여자니까. 계산을 마치고, 카드를 받아 든 은서가 흡족한 미소를 짓는다. 어제 로카마두르 레스토랑에서 그녀가 생테밀리옹을 마시고 푸아그라를 먹을 때 짓던 표정이다.


“힘들지? 나, 갤러리 좀 둘러보고 올 테니까 저기 성당에서 기다릴래?”

부티크를 나서던 은서가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살핀다. 카페가 싫다던 그의 말을 염두에 둔 것 같다.

“알았어.”

엄마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처럼 태주의 발걸음이 성당으로 향한다. 시끌벅적한 장날의 활기를 뒤로하고 묵직한 성당 문을 여는 순간 스르르 다리에 힘이 풀린다. 마음과 달리 몸은 아직 회복이 덜 됐나 보다. 쓰러지듯 의자에 걸터앉은 태주의 시선이 스테인드글라스로 향한다. 그때였다.

“난 이렇게 스테인드글라스가 소박한 성당이 좋더라.”

어디선가 환한 웃음을 머금은 아내 목소리가 들렸다. 마음에 꼭 드는 것을 발견하고 기쁨을 감추지 못할 때마다 아내가 내는 특유의 콧소리도 들은 것 같다. 화들짝 놀란 태주가 주위를 둘러본다. 아내는 없다. 분명 아내 목소리를 들었는데 아무리 주위를 두리번거려도 아내가 없다. 불길한 기운이 솟구치며 그의 심장이 도망자처럼 뛰기 시작한다. 불안한 눈빛으로 다시 성당을 둘러본다. 역시, 아내는 보이지 않는다. 환청을 들은 것일까. 태주는 온몸의 기를 모으고 숨을 몰아쉬며 입안에 고인 침을 삼킨다. 생각을 모아야 한다.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 아니, 정신을 차려야 한다. 아내는 여기 없다. 여기 없어야 한다. 그런데 왜? 불안하게 흔들리던 그의 눈에 어느새 물기가 서린다. 투두둑 주체하지 못한 눈물이 깊은 탄식으로 흐른다.

“여보”

흐느끼는 그의 어깨로 작고 부드러운 손길이 스친다. 무심한 작은 새의 날갯짓이 그의 어깨를 스친 것 같은 감촉이다. 홱 태주가 몸을 돌린다. 불안한 시선으로 이리저리 성당 안을 훑어본다. 제단에 초를 밝히는 여자의 뒷모습이 왠지 익숙하다. 아내다, 아내가 분명하다. 태주는 두 눈을 꾸욱 감았다 뜨며 눈앞의 현실을 확인한다. 아내가 틀림없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던 태주의 몸이 휘청 인다. 어지럼증이 몰려온다. 가슴을 부여잡고 태주는 그리움에 젖은 외침을 울컥 토해낸다. 여보, 선영아! 제단에 초를 밝힌 여자가 사분사분한 걸음으로 성당을 빠져나간다. 마음이 급해진다. 이번에도 아내를 못 잡으면, 아내가 영영 사라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엄습한다. 태주는 휘청이는 걸음으로 아내를 따라 성당 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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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를 곧추세우고 팔자걸음을 걷는 아내가 바람처럼 빠르다. 하늘하늘한 아내의 뒷모습이 와글거리는 시장 인파 속으로 사라진다. 허둥거리는 그의 걸음이 자꾸 엇갈린다. 여보, 선영아. 입안을 맴도는 아내의 이름을 밖으로 뿜어내지 못한 채, 그는 돌바닥으로 고꾸라진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이 태주에게로 향한다. 그 바람에 잠시 아내의 발걸음이 멈춘 것 같다. 어서 아내를 잡아야 한다.

“여보, 잠깐만 기다려.”

그의 외침과 함께 머뭇거리던 아내가 트랙에 들어선 레이서처럼 달리기 시작한다. 아내를 잡아야 한다. 바닥을 박차고 일어선 태주도 아내를 따라 뛰기 시작한다. 찌릿한 통증이 가슴을 옥죄어 온다. 가슴까지 차올랐던 숨이 목울대를 향해 붉은 혀를 날름거리며 그를 위협한다. 비릿한 피 냄새가 입안에 가득해진다. 앞서 달리던 아내가 골목길로 꺾어진다. 몇 걸음 차이다. 그의 발길이 돌길을 달려 골목으로 꺾어진다. 동시에 그의 몸이 얼음처럼 굳어진다.

유리 창문 하나 없이, 삼면이 돌로 막힌 작은 공간. 그 막다른 골목에서 아내가 사라졌다. 아렌느 공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아내를 놓치고 말았다. 그의 무릎이 꺾인다. 온몸에 힘이 빠져나간다. 벌게진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솟구친다. 시한폭탄처럼 폭발하는 서러움에 그는 몸을 가누지 못한다. 이대로 아내를 포기할 수 없다고 이를 악문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아내에게 용서를 구하고 아내를 달래줄 마지막 기회. 아내의 늪을 벗어나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아내에게 항복을 선언하는 거다. 자존심 싸움은 이제 그만 끝내고 모두 잘못했다고 아내에게 용서를 구하는 거다. 겨우 울음을 삼킨 그의 눈이 야릇한 희망으로 번뜩인다. 스마트폰을 꺼내 조심스레 아내의 번호를 누른다. 무정한 아내의 휴대폰은 여전히 꺼져있다. 그래도 좋다. 그는 목이 터져라, 스마트폰에 대고 몸 안의 에너지를 남김없이 끌어내어 소리친다. 아내에게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용서해달라고, 눈물로 애원한다.

“여보. 나야. 나,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 미치도록 당신이 그립고, 죽을 것처럼 당신이 보고 싶다고. 알아들어? 내가 잘못했어. 다, 다, 다 내가 잘못했어. 내가 지금 갈게. 당장. 당신한테로 당장 갈게.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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