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별이 빛나는 다락방
배려는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적어도 은서는 그렇게 믿는다. 서로 사랑하는 동안, 그는 그녀를, 그녀는 그를 끊임없이 배려했다. 서로에게 향했던 배려가 희부연 도시 안개처럼 희미해지다가 잔인하게 뿌리 뽑히던 순간, 기다렸다는 듯 사랑도 끝나버렸다. 그렇게 이별의 슬픔을 겪으며 은서는 사랑과 배려의 비례 법칙을 터득했다. 큰 것을 바라지 않았다. 예전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서로의 취향을 존중해주자는 것뿐인데, 태주는 그마저도 무시했다. 화가 났다. 마음에 들지 않는 호텔에서 시작된 갈등은 아렌느 공원으로 이어졌고, 호텔을 바꾸자는 문제로 폭발했다. 사소한 폭발이라 여겼으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태주가 튕겨 나갔다. 아찔한 사고 같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 은서는 당황했다. 그녀가 오랜 망설임 끝에 그린 그림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예전처럼 태주가 또 그녀를 벗어날지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강풍이 되어 휘몰아쳤다. 시간이 없었다. 일단 그의 차를 막아서고, 막무가내로 그의 차에 올랐다.
태주의 푸조가 후퓌낙을 향해 달리는 동안, 은서는 조용조용 다가와 목을 조이는 검은 안개 같은 혼란에 휩싸인다. 꾹꾹 눌러 감추어두었던 독한 말을 쏟아내면 속이 시원해질까. 그러면 무엇이 달라질까. 엉엉 소리 내서 울고 나면 사이다를 마신 듯 상쾌해질까. 그나저나 태주와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일까. 입술을 앙다문 은서는 시선을 고정한 채 뚫어져라, 앞만 바라본다.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가 어떤 얼굴로 운전하고 있는지, 왜 이 남자가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지, 미칠 듯이 궁금한데 그를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바위처럼 단단하고 거대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짓누른다. 가슴이 갑갑해지고 숨쉬기도 힘들다. 냉탕과 온탕 사이를 오가는 것처럼 그녀의 가슴이 차가워졌다 뜨거워지기를 반복한다. 더 비참해지고 싶지 않아 입술을 깨물며 눈을 질끈 감는다. 그녀의 온몸에서 더듬이가 돋아나 그에게로 향하고 있다.
‘제발 내게 말 좀 걸어줘. 뭐라고 한마디라도 해달란 말이야.’
은서는 이번 여행의 끝을 상상하고 싶지 않다. 이번 여행을 빌미로 두 사람의 인생 여정이 시작되기를 얼마나 바랐는데…… 여행을 끝낼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야속한 예감이 그녀를 조여 온다. 어느새 태주의 자동차가 호텔 주차장으로 들어선다. 봇물 터지듯 서러움이 앞을 막아선다. 비겁한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다. 은서는 마지막 자존심을 챙겨들 듯 서둘러 차에서 뛰어내리며 거칠게 문을 닫는다.
쾅 소리와 함께 세상이 정지되어 버린다.
튕겨 나오듯 태주의 차를 벗어난 순간이, 단 몇 초의 찰나가 영겁의 세월처럼 길게 늘어진다. 그와 동시에 그녀 안의 고요가 산산 조각난다. 빙하수를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든다. 지금 그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대체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가.
돌아서는 그녀의 발길이 휘청거린다. 가슴을 에는 허무감이 그녀를 에워싼다. 겨우 참고 있던 숨을 뱉어내는 순간 세상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그녀의 존재가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날카로운 무언가가 헤집어 놓은 듯 가슴이 휑해지며, 둔기로 머리를 맞은 듯 눈앞이 하얘진다. 비로소 진실이 보인다. 배려를 핑계로 치졸했던 그녀 자신이 미워진다.
이번 여행을 준비한 건 태주였다. 페리고르로 여행 가자는 그녀의 말에 화답하듯 그는 묵묵하게 여행 일정과 계획을 짜고, 호텔을 예약했다. 엑상프로방스 테제베 역에서의 재회는 또 얼마나 가슴 뭉클했던가. 플랫폼을 빠져나오다 그녀를 마중하려고 나와 있는 그를 보았을 때, 은서는 당장 뛰어가 그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그와 함께 하는 여행에 그녀의 모든 것을 걸고 싶었다. 여행을 통해 그의 인생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왜 그녀는 그와의 여행에 만족하지 못하고 투덜거리기만 했을까. 왜 빡빡한 그의 여행 일정을 버겁다고 비난하고, 간단한 샌드위치로 끼니를 해결하려는 그의 가난한 근성을 미워했을까. 그가 예약한 호텔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트집을 잡다가 결국 싸움까지 일으켜야 했을까.
은서는 그에게 여행을 이야기하기까지 얼마나 망설이고 주저했던가를 떠올린다. 용기를 내어준 그에게는 얼마나 고마웠던가를, 이번 여행으로 달라질 그녀의 인생을 기대하며 얼마나 행복했던가를 생각한다. 스무 살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가 다르듯 태주가 달라진 건 당연한 일인데, 왜 그 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던가. 왜 태주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자신과 줄리앙이 달랐던 것처럼 태주와 그녀도 다를 텐데 말이다.
돌이켜보면 연애 시절의 태주는 자신보다 그녀를 더 사랑한 남자였다. 은서가 콜록거리며 기침만 해도 쏜살같이 약을 사다 주고, 우산을 잃어버린 은서를 걱정해서 폭우를 뚫고 마중을 나오던 남자였다. 은서가 동아리 선배들과 술을 마시면 꼭 밤늦게까지 기다렸다가 바래다주던 남자, 그러면서도 그녀가 화를 내면 무조건 받아주고, 투정 부리는 그녀를 넓은 가슴으로 다독여주던 남자였다.
그와 함께했던 추억이 그녀를 아프게 몰아친다. 이제, 예전의 태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그녀를 다그친다. 나머지 인생을 함께하고 싶다면 더더욱 그래야 하는데, 대체 왜 그녀는 여행 내내 심술만 부려댔던 것인가. 울컥 미안한 마음에 은서의 몸이 회귀하는 은어처럼 태주에게로 향한다. 그런데 태주가 이상하다. 어두운 그의 얼굴에 슬픔이 가득하다. 일그러지는 그의 입매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온다.
“태주야!”
운전석으로 뛰어가며 은서가 호텔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
“도와주세요. 오 스쿠! 오 스쿠!”
벌컥, 운전석 문을 열고 태주에게로 달려드는 은서의 손길이 두려움으로 부르르 떨린다.
호텔 다락방 하늘 창문으로 별이 쏟아진다. 태주 옆에 누운 은서는 별을 바라보며 하마터면 잃어버렸을 행복을 만끽하는 중이다. 운이 좋았다. 마침 호텔에 투숙 중인 영국인 의사가 응급처치를 했고, 호텔 주인의 신속한 신고로 구급차가 출동했다. 은서는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얼굴로 태주와 함께 응급실로 향했다. 이대로 태주를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잔인한 협박범처럼 그녀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불안정형 협심증이었다. 의사는 관상동맥이 좁아져서 가슴 통증을 유발했다는 설명과 함께 태주에게 혈관확장제를 투여했다. 증상이 아기 걸음마처럼 느릿느릿 호전됐다. 겨우 정신은 차렸으나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태주를 바라보는 그녀의 가슴이 송곳에 찔린 듯 아리고 아팠다.
“우리, 이러고 있으니까 꼭 별이 쏟아지는 들판에 누워있는 것 같다.”
다락방 하늘 창문으로 밤하늘을 바라보는 태주의 눈이 꿈을 꾸는 소년 같다. 몸 상태가 많이 좋아진 듯하다.
“은서야. 나 지금 예전에 네가 읽어주던 프랑스 소설, ‘별’이 생각났어.”
희미한 기억 하나가 별똥별처럼 은서의 가슴으로 떨어진다. 알퐁스 도데의 ‘별’이 자아내던 지고지순한 사랑에 감동해서, 태주를 만날 때마다 소설을 읽어주었던 추억. 그때 태주는 소설에 담긴 애틋한 사랑보다, 뒤 떵 끄 쥬 갸흐데(Du temps que je gardais)로 시작하는 그녀의 멜랑꼴리 한 프랑스어를 좋아했다. 그녀가 가만가만 읽어주는 소설을 들으며, 멀리 남프랑스에 있는 루베롱산과 양치기와 그가 사랑했던 스테파네트 아가씨를 상상하곤 했다. 프랑스로 유학을 가게 되면, 루베롱산을 함께 오르자는 속절없는 약속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기억나? 한동안 네가 나를 별 씨라고 불렀던 거?”
“응. 별 아가씨를 줄여서 그렇게 불렀었지. 그때는 은서 네가 꼭 길을 잃고 헤매다가 내 어깨로 떨어진 별 같았거든.”
“좀 유치했던 거 알지?”
“닭살이었지.”
“유치했어도 난, 네가 그렇게 불러주는 게 좋았었어.”
“원래 사랑이란 게 유치하잖아.”
“그럼, 우리도 유치해져 볼까?”
분위기를 이기지 못하고 은서가 와락 태주의 목을 끌어안는다.
“어, 어, 야! 나, 환자야.”
개구쟁이 미소로 가득해진 태주의 얼굴이 그녀에게로 다가온다. 그녀를 안는 팔의 힘이 점점 강해진다. 천천히 그녀를 향해 다가오는 그의 입술에서 향기로운 차향이 피어난다. 6월의 페리고르 별 밤이 그녀의 머리 위로 쏟아진다. 태주의 입술이 거대한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통로가 되어 그녀를 삼킨다. 밤하늘을 밝히며 형형색색 불꽃이 터진다. 천진난만한 스테파네트 아가씨처럼 웃음이 차오르며 달콤한 꿀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행복이 밀려온다.
은서는 작은 욕심 하나를 가슴에 품는다. 태주와 이렇게 싸우고 화해하며 도란도란 살고 싶은 소망 하나를 품는다. 아무리 바쁘고 힘든 하루를 보냈더라도 이렇게 나란히 잠자리에 누워 손을 잡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사랑도 나누며 늙어가는, 행복한 풍경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