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페리고르-
17장 여행은 악몽이 되고

by 소심한 삘릴리

17. 여행은 악몽이 되고

“라 샤또 데 헤냐에 있어. 여기, 참 마음에 드네. 이리로 올래?”

다행히 은서 목소리가 날랑날랑하다. 살짝 웃음기도 묻어있다. 잠시 은서의 존재를 망각했던 것이 미안한 태주는 출발을 서두른다. 주차장에서 차를 찾고, 은서가 문자로 보내온 호텔 주소를 내비게이션 톰톰에게 입력한다. ‘라 샤또……’로 시작되는 호텔이라면, 오래된 성을 개조해서 만든 곳 같다. 게다가 페리괴에서 서쪽으로 3km나 떨어져 있다. 대체 은서는 왜 갑자기 샤또 호텔로 간 것일까?

푸조를 몰고 호텔로 들어서는 순간, 태주는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껴입은 불편함에 사로잡힌다. 동시에 까닭 모를 불안감이 엄습한다. 그녀가 무언가 일을 벌인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1층 카페에서 맥주를 마시던 은서는 호텔을 바꾸자며, 후퓌낙에 있는 르네상스 호텔로 가서 짐을 가져오란다.

“이미 체크인을 했는데, 어떻게 그래?”

“그냥 체크아웃 해! 환불해달라는 것도 아닌데, 뭐 어때?”

“호텔비를 날리라고? 싫어. 그런 낭비는 용납할 수 없어.”

“나한테는 그런 호텔에서 자는 게 낭비야. 인생을 허비하는 기분이라고.”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

“호텔비는 걱정하지 마. 내가 계산할 테니까.”

태주의 얼굴이 절망으로 일그러진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난감하다. 여행을 계획하며 이런 상황이 벌어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르네상스 호텔이 왜 싫은데?”

태주의 눈빛이 서늘해진다.

“거긴 민박집이지 호텔이 아니야. 난, 허름한 민박집에서 우리의 소중한 여행을 망치고 싶지 않아.”

“꼭 고급 호텔에서 묵어야 여행이 즐거운 건 아니잖아.”

“좋은 호텔에서 묵으면 여행은 더 즐거워질 수 있어.”
“그래 봤자, 겨우 하룻밤이야. 비싼 호텔에서 잘 돈이면 이틀은 더 여행하겠다.”

“우리가 지금 배낭여행 중이니? 아니잖아, 그리고 난……”

은서가 입술을 앙다물며 태주를 노려본다. 갈팡질팡 중심을 잃은 그녀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며 흔들린다.

“너랑 여행하는 일이…… 솔직히, 견디기 힘들어.”

은서의 폭탄선언이 잔인한 킬러처럼 태주의 심장을 가격한다. 그의 얼굴에 싸늘한 냉기가 서린다. 여행을 시작하던 순간부터 느껴지던 두 사람 사이의 묘한 삐걱거림이 정체를 드러낼 때가 된 것 같다.

“뭐가 불만인데?”

태주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는다.

“전투하듯 몰아치는 거. 어떻게 여행이 그래?”

어제부터 계속되던 갈등을 뚫고 은서의 불만이 터져 나온다. 그녀의 목소리에 살짝 떨림이 서린다.

“그게 뭐 어때서? 더 많은 곳을 돌아다니고, 구경하면 좋잖아?”

“아니, 싫어. 나는 하루에 한 도시를 구경하는 것도 벅차. 그런데 넌 어제 메뚜기 뛰듯 세 도시를 돌아다녔어. 너, 어디서 뭘 봤는지, 기억이나 하니?”

“당연히 기억하지. 기억도 못 하면서 여행을 하겠어?”

“아니, 너는 도시의 겉모습만 보고 기억했다고 착각하는 거야. 여행은 그 도시의 모습뿐 아니라 도시가 가진 이야기를 만나는 행위야. 도시의 맛과 멋을 알고, 그 도시의 삶을 느껴야 진정으로 여행하는 거라고.”

“어차피 하루, 이틀 여행으로 도시의 삶을 느낄 수는 없어.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여행 스타일과 철학이 있겠지만 나는 그래. 적은 비용으로 큰 효용을 얻을 수 있는 여행을 하고 싶어. 그래서 저렴한 호텔에서 자고, 샌드위치로 점심을 먹더라도 가능한 많은 곳을 둘러보는 여행이 좋아.”

“왜, 네 스타일만 고집해? 내가 싫다고 하잖아.”

“그래서 오늘 아침에 각자 스타일대로 여행도 했잖아.”

“그게 왜 각자 스타일이야? 어제 분명히 네가 그랬지? 오늘은 느긋하게 돌아다니겠다고. 그런데 오늘도 어제랑 똑같이 세 도시를 돌았어. 난, 그게 더 서운해. 나를 전혀 배려하지 않는 네 태도 말이야.”

“배려……라고?”

배려, 라는 말이 은서의 입술 사이로 빠져나오자 태주는 허탈해진다. 그녀를 배려하지 않았다니, 지금까지 그녀를 배려하느라 얼마나 마음이 꼬이고 여행이 엉망이 됐는데, 배려하지 않았다니, 기가 막힌다. 갑자기 마주 앉은 은서가 가시투성이 선인장 같다. 다가갈수록 그 가시에 찔려 피 흘리게 되는 선인장처럼 아프게 느껴진다. 뻣뻣한 그녀의 눈길이 어줍게 그를 스친다. 아, 떨어져 살았던 시간의 간극보다 두 사람 사이가 돌이키기 힘들 만큼 멀어진 것 같다.

“피곤하다. 그만하자.”

태주가 싸늘한 표정으로 일어선다. 절벽 앞에 선 기분이다. 아무래도 여행의 끝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은서가 원하는 대로 그녀의 짐을 이 호텔로 가져다주고, 여행을 마무리 지을지 말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태주는 힘없이 카페를 빠져나와 호텔 주차장으로 향한다.


110603_172.JPG

“그렇게 가버리면 어떡해?”

막 출발하던 길이었다. 하마터면, 급브레이크를 밟지 못했더라면 그녀를 칠 뻔했다. 놀란 태주는 그의 푸조를 막아선 은서가 무사한 것을 확인하자, 무모한 그녀의 행동에 질려 와락 화가 치민다. 터져 나오는 욕지기를 겨우 참으며 그녀를 노려보는데, 은서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눈꼬리가 올라가고 입술이 일그러진다. 서러움이 곧 눈물로 폭발할 것 같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자니 온몸의 힘이 적군에게 쫓기듯 빠져나간다. 겨우 몸을 추스르며 길게 숨을 몰아쉬는데, 은서가 체념한 얼굴로 조수석에 올라탄다.

“일단 같이 가자.”

‘네 짐을 가져다주려고……’

태주는 입안을 맴도는 변명을 뱉어내지 못한다. 은서와 말을 이어나갈 힘이 없다. 연장전을 뛰고 난 축구선수처럼 온몸에 피로가 몰려온다. 슬쩍 은서를 곁눈질로 훔쳐본다. 곧 폭발할 것 같던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침묵 속으로 빠져든 은서의 눈에 초점이 없다. 호텔 주차장을 빠져나가며 태주는 서늘하고 축축한 냉기를 느낀다. 서먹한 분위기에 잠식당한 차 안이 답답해진다. 폭풍전야의 고요가 감돈다. 잔뜩 약 오른 독사 같은 얼굴로 뚫어져라, 앞만 보던 그녀가 지친 듯 눈을 감는다. 그렇게 침묵 속으로 빠져든다.

북극한파의 냉기가 그를 감싼다. 운전대를 잡은 그의 손에 핏기가 사라지며 힘이 빠진다. 여행이 복잡하게 꼬인 매듭처럼 점점 불편해진다. 이제 정말로 여행의 끝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아, 이 여행을 어떻게 마무리할지 모르겠다. 태주는 새삼 무모했던 자신을 후회한다. 은서를 진정으로 사랑했다고 믿었던 세월이 새털보다 가볍고, 덧없었다는 사실을 겨우 이틀 만에 확인하다니… 가슴 깊은 곳에서 울음 같은 한숨이 새어 나온다. 옳다고 믿었던 진실에 배신당하고, 그는 휑한 가슴으로 자조한다. 역시 지나간 사랑은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 은서에게 실망해서라기보다 세월을 이겨내지 못한 나약한 사랑을 탓하고 싶다.

더 기막힌 건 암울한 침묵 사이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아내의 기억이다. 비겁하게도 그는 절망의 벼랑 끝에 서서 또 아내를 떠올린다. 아내와 행복했던 추억을 되새기며 현재를 후회하고 있다. 소곤소곤 그를 웃게 하던 아내의 속삭임이 환청처럼 들린다. 아내가 우울증을 앓기 전, 따뜻하고 달콤했던 아내의 웃음이 사무치게 그립다. 힐끗 조수석을 본다. 질끈 눈을 감은 그녀가 아내였으면, 하는 헛된 바람마저 든다. 르네상스 호텔과 가까워질수록 태주의 가슴이 먹먹해진다. 아내는 항상 그가 예약한 숙소를 좋아했다. 아무리 낡고 허름한 호텔이나 저렴한 유스호스텔을 예약했어도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예약한 숙소의 보이지 않는 장점을 어렵게 찾아내며 만족해했다. 이번에 예약한 호텔을 아내가 보았다면 틀림없이 만족한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새삼, 여행비용을 아낀다며 그동안 아내를 허름한 호텔이나 유스호스텔에서 재운 것이 미안해진다.


110603_198.JPG

주차장에 차를 세우기 무섭게 은서가 차 문을 거칠게 열어젖힌다. 찬바람을 일으키며 차에서 내린 그녀는 시위하듯 쾅 소리가 나게 문을 닫는다.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 애쓰며 태주는 은서를 모른척해 버린다. 그의 시야로 호텔 다락방이 보인다. 아내가 좋아하던 스타일. 아내가 여행 블로그에서 찾은 다락방 호텔과 쌍둥이처럼 닮은 건물이 보인다. 저런 호텔에서 꼭 한번 자보고 싶다고, 아내가 소원처럼 말했는데, 그는 아내의 바람을 들어주지 못했다. 7성급 럭셔리 호텔을 원했던 것도 아니었는데, 그는 아내의 소박한 소원을 들어주지 못했다. 아내에게 미안하다. 가슴이 미어진다. 아련한 통증이 묵직하게 차오른다. 깊게 베인 상처에 굵은소금을 뿌려대는 아픔이 전해진다.

“여보. 선영아!”

악령 같은 회한이 그의 목을 죄어온다. 거대한 바윗덩이처럼 몸을 불린 악령이 검은손을 뻗어 그의 심장을 움켜쥔다. 악령의 손길이 점점 거세진다. 감추었던 손톱을, 길고 뾰족하게 갈아 놓은 손톱을 그의 심장에 박은 다음, 후벼 파기 시작한다. 핏물처럼 서러움이 차오르며 가슴이 뻐근해진다. 아아, 심장이 쪼개질 듯 아프다. 혈관을 따라 피 울음 같은 고통이 거대한 해일처럼 솟구친다. 가슴을 움켜쥐는 그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솟는다.

이전 15화6월의 페리고르- 16장 햇살이 지겨운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