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햇살이 지겨운 날
태주를 따라 생프롱 대성당으로 들어서는 은서의 발걸음이 천근만근이다. 목줄에 묶여 억지로 끌려 나온 강아지가 된 기분이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선다. 페리괴에서 가장 유명한 문화유산이라는 성당이 그녀의 눈에 곱게 보이지 않는다. 어제 콩크에서 보았던 성당보다 규모가 큰 탓일까. 아니면 여행에 대한 의지가 꺾이고 기분이 능수버들처럼 축 처진 탓일까. 어마어마한 역사와 규모를 자랑하는 성당에 자꾸 반감이 든다.
“이 성당이 프랑스 남서부에서 가장 큰 교회 건축물 중 하나래.”
은서 주위를 맴돌던 태주가 아는 척을 한다. 1120년 화재가 일어난 수도원 자리에 그리스식 십자가 형태로 성당을 새로 지었다는 것이며, 높이 솟은 둥근 지붕이 다섯 개나 되고 수없이 늘어선 장식 탑이 교회를 더 화려하게 만들었다는 설명도 해준다. 모범답안을 줄줄 외우는 우등생처럼 태주의 표정이 의기양양하다. 은서는 그런 태주를 외면하고 만다. 숨이 막힌다. 그녀는 웅장한 중세의 성당들과 마주할 때마다 아름다움을 감탄하기보다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이 성당을 짓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신앙의 이름으로 착취를 당했을까. 종교라는 억압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성당 신축에 동원돼서 피와 땀을 흘리며 죽어갔을까. 은서는 성당을 둘러보며 ‘세상의 모든 문화재는 선대의 피를 먹고 이루어져 후대에 덕을 보인다.’고 했던 역사학자의 말을 떠올린다.
침울한 마음 탓일까. 은서는 여행이 슬슬 지겨워진다.
아렌느 공원으로 들어서자 태주의 눈이 빛난다. 로마 시대 원형 투기장이었다는 공원의 이국적인 풍경이 그를 자극한 것 같다. 이대로 어리바리하다가는 태주의 손에 끌려 다리가 아프도록 공원 순례를 하게 될 것 같다. 은서는 선수를 치듯 분수대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심플하고 모던한 4단 분수 주위에는 나른한 오후의 햇살을 즐기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그녀의 눈에 벤치 하나가 들어온다. 햇살이 잘 드는 자리에 놓인 벤치. 아쉬운 대로 선탠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은서는 주저 없이 벤치로 다가가 벌러덩 드러눕는다.
“공원 구경은 안 할 거야?”
어느새 태주가 벤치 앞에서 볼멘소리를 한다. 더는 참을 수 없다. 억지로 화를 참느라 새침해진 은서는 질끈 눈을 감아버린다. 만사가 귀찮다. 한 번만 더 그녀를 다그치면 가만두지 않을 테다. 버럭 솟구치는 신경질을 억누르지 않을 테다. 시합을 앞둔 복서처럼 그녀는 잔뜩 마음을 벼른다. 한바탕 전쟁이라도 치르겠다는 각오로 끝까지 그를 외면한다. 몇 분쯤 그러고 있었을까. 태주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온다. 풀 죽은 시금치처럼 시들해 보인다. 쉬고 싶다는 그녀를 호텔에서 억지로 끌고 나오던 집요함은 어디로 갔는지, 그는 휑하니 바람을 일으키며 등을 돌려 자리를 떠난다. 멀어지는 태주의 발소리를 확인한 은서는 도도한 페르시안 고양이처럼 천천히 벤치에서 몸을 일으킨다. 따뜻한 6월의 페리고르 햇살이 그녀의 마음으로 촉촉하게 스며든다.
분수를 중심으로 펼쳐진 풍경이 평화롭다. 분수에 몸을 담그고 물놀이를 즐기는 아이들을 바라보던 은서는 문득 아들 레오가 보고 싶어 진다. 아이폰을 꺼내 레오의 번호를 누른다. 전화기가 꺼져있다. 무슨 일이지? 은서는 전남편 줄리앙의 번호로 다시 전화를 건다. 신호는 가는데 받지 않는다. 어제 레오와 통화할 때, 하일랜드 글렌코를 다녀온다고 했었다. 별일 없겠지, 하면서도 은서는 쉽게 전화를 끊지 못한다. 문득 줄리앙이 외박을 할 때마다 미친 여자처럼 수없이 전화를 걸던 기억이 불쑥 다가선다. 급류에 휘말리듯 빠르게 차오르는 우울을 밀어내며 그녀는 서둘러 전화를 끊는다. 스산하고 나쁜 기운이 그녀의 몸을 스르륵 감싸는 것 같다. 자꾸 가라앉는 마음을 달랠 길 없다. 그래도 햇살은 여전히 좋다.
태주의 산책이 지나치게 길어진다. 은서는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그를 찾아 나선다. 군데군데 아치형 돌문들이 보인다. 옛날의 영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아래 부분만 남은 원형 투기장의 출입문들이다. 아치형 문의 상부는 켜켜이 쌓인 흙과 그 속에서 자라난 수풀이 어우러져 색다른 모습이다. 은서가 지루한 걸음으로 막 아치형 돌문을 지나칠 때였다. 저만치로 태주가 보였다. 빠른 걸음으로 아치형 돌문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 열 걸음만 다가서면 곧 마주칠 거리다. 순간 그녀의 얼굴이 발그레해진다. 조금 전까지 태주가 미워 죽겠다던 마음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자존심도 없나 보다. 은서는 혼자 피식 웃고 만다. 괜히 민망해진 은서는 그를 찾아 나선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슬쩍 그를 외면하며 걷는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폭을 유지하며 걷다가 그와 정면으로 마주치는 결정적인 순간에 말을 걸 생각이다.
‘심심해서 산책이나 하려고……’
변명처럼 둘러댈 말을 입안의 사탕처럼 굴리던 그녀가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그를 쳐다본다. 그런데 태주가 이상하다.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눈빛이 멍하다 싶더니, 빠른 걸음으로 그녀를 스쳐 지나간다. 이게 아닌데, 울컥 서러움이 솟구친다. 아무리 침묵시위를 했다고 이렇게 무시를 당하다니 기가 막힌다.
“태주야.”
구겨진 자존심을 겨우 붙잡으며 그를 부른다. 모른 척이다. 누군가를 쫓아가듯 태주는 뒤도 안 돌아보고 허적허적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는 중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야단을 맞은 기분이다. 기막힘을 넘어서 허탈하다.
“야, 김태주. 너 정말 이럴래?”
분을 이기지 못한 은서가 그의 등을 향해 꽥 소리를 질렀으나, 여전히 응답이 없다. 창피함을 무릅쓰고 언성을 높이던 은서의 눈가가 서러움으로 붉어진다. 이제 더 참을 수 없다. 이런 모욕을 당하게 될 줄 정말 몰랐다. 은서는 그 길로 공원을 나와 시내로 향한다. 이대로 여행을 끝내고 싶은 심정이 벼락처럼 솟구친다. 우선 택시를 불러 호텔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허둥거리며 페리괴 콜택시 번호를 찾는데, 아이폰이 울린다.
“은서! 지금 콩크에 있어?”
이렌느다. 다시 찾아온 그녀의 사랑을 누구보다 기뻐하고 축하해 주던 친구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콩크의 석양을 바라보라고 신신당부했던 단짝 친구를 확인하는 순간, 은서의 콧등이 시큰해진다.
“어때, 내 말대로 콩크의 석양이 황홀하지?”
“어, 이렌느. 사실은 말이야, 어제 콩크에서 석양을 못 봤어.”
“왜? 무슨 일 있었어?”
“아니, 그이가 로카마두르에서 석양을 보자고 해서……”
“뭐? 콩크에서 로카마두르까지 갔다고? 와우, 네 남자 친구 에너지가 넘치는구나?”
“어, 우리 한국 사람들이 좀 그래.”
“그럼, 지금 로카마두르에 있는 거야?”
“아니. 페리괴.”
“완전, 동에 번쩍 서에 쩍이군. 페리괴에 있다면, 꼭 들려봐야 할 곳이 또 있지.”
이렌느의 목소리가 한껏 들떴다. 은서의 사랑을 제 것인 양 기뻐하는 그녀가 느껴진다.
“거기가 어딘데?”
“라 샤또 데 헤냐. 페리괴에서 제일 좋은 레스토랑과 호텔이 있는 곳이지. 내가 위치를 찍어서 보내줄 테니까 꼭 가봐. 알았지? 네 사랑과 좋은 시간 많이 보내고……”
은서는 이렌느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평소 같았으면 폰을 붙잡고 그녀에게 미주알고주알 모든 것을 털어놓았을 텐데, 지금은 왠지 그럴 기분이 아니다. 그래도 이렌느와 통화를 하고 나니 서럽던 마음이 한결 누그러진다.
이렌느가 추천해준 샤또는 은서의 취향에 꼭 맞았다. 나폴레옹 3세 시대의 호화로움을 제대로 맛볼 수 있을 것 같다. 샤또를 둘러보는 사이 그녀의 기분이 시나브로 좋아진다. 19세기 미술과 현대의 모던함이 만나 환상의 조화를 보여주는 형상이다. 정원 뒤쪽으로 보이는 수영장도 예술이다. 진작 이런 곳에 머물렀어야 했다. 은서는 이제야 제집을 찾아온 것 같은 편안함을 느낀다. 날이 덥다. 우선 1층에 있는 카페에서 목부터 축여야 할 것 같다. 카페에 자리를 잡은 은서가 막 맥주를 주문하는데, 아이폰이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