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여행을 즐기는 온도의 차이
차라리 오전에 몽띠냑에서 혼자 보낸 시간이 좋았다.
호텔로 들어서는 순간 은서의 가슴에 휑한 절망의 그늘이 드리운다. 들뜬 마음으로 포장이 화려한 선물을 풀었다가 실망한 기분이 이럴까. 곰처럼 미련한 태주는 그녀의 마음은 아랑곳없이 제 욕심만 차린다. 그가 변해도 너무 변했다는 낙담에 쓰러지듯 침대로 누운 은서의 얼굴이 서러움으로 일그러진다. 질 나쁜 면 시트를 씌운 침대는 쌀쌀맞은 이웃처럼 딱딱하고 팍팍하다.
은서는 등을 돌린 채 누워 깊은 한숨을 쉬며 오늘을 곱씹어 본다. 겨우 이틀인데, 여행이 참 길게 느껴진다. 피곤하다. 일상을 떠나 마음을 풀어놓고 쉬는 것이 아니라 전투를 치르는 것 같다. 돌격 전진해서 고지를 점령하고 싸워서 이겨야 하는 전투처럼 태주를 따라 페리고르 지방을 정복하러 온 것 같다. 왜 태주는 무슨 일이든 조급하게 서두르고 목표를 달성하느라 허겁지겁하는지 모르겠다. 조금만 천천히 걸으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왜 그것을 모르는지 안타깝다. 그녀의 기억 속에 존재했던 태주는 그렇지 않았다. 아무리 세월이 오래오래 흘렀고,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에 길들었다 하더라도 그의 천성이 이렇게 바뀌다니 믿을 수 없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도 거짓인가 보다.
55,000년 된 라 로크 생 크리스토프 동굴 앞에서도 아찔했다. 그냥 두면 태주는 그곳에서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발자취를 둘러보기 전에는 꼼짝도 안 할 기세였다. 절벽 위에 있는 집 메종 포르테 드 레낙에서도 미련을 보이더니, 푸아그라 농장들이 있는 동네를 지나는 동안에도 목표량을 채우지 못한 세일즈맨처럼 초조한 눈빛이었다. 결국, 레제지로 와서 선사시대 박물관을 돌아보고 나서야 마음의 안정을 찾는 것 같았다.
선사시대 박물관은 은서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비위를 맞추듯 그를 따라 박물관을 둘러볼 뿐이었다. 무엇에게 홀렸는지 박물관에서 태주의 행동이 얼핏 얼핏 이상했다. 아니 크리스토프 동굴 앞에서도 그랬다. 무언가에 쫓기는 것 같았고, 가끔 초점을 잃은 눈으로 멍하니 한 곳을 바라보기도 했다.
더 큰 문제는 은서에게 있었다. 배가 고파서 그에게 집중할 수 없었다. 아침으로 겨우 컵라면 하나를 먹은 은서의 머릿속은 온통 먹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녀가 먹는 타령을 하게 될 줄 몰랐다. 줄리앙과 여행할 때는 이러지 않았다. 먹는 일을 인생의 즐거움으로 여기는 줄리앙 때문에 여행할 때마다 유명 레스토랑을 찾아다녔고, 최고의 요리와 와인을 먹고 마셨다. 평소 먹는 일에 큰 관심이 없던 그녀는 미식을 고집하는 줄리앙의 유난함을 지겨워하느라, 여행 중에 배고픔 따위를 느끼지 못했다. 지금 그녀는 배고프다. 쓱쓱 기분 나쁘게 몰려오는 허기로 인해 마음마저 가라앉고 침울해졌다. 어쩌다 그녀가 먹는 일에 연연하는 사람이 됐는지, 은서는 그런 자신이 기막혔고 자존심 상했다. 어린아이처럼 보채는 것 같아 태주에게 먼저 밥 먹자는 소리도 못했다. 나름 버티느라 힘들었다. 이른 아침을 먹고 호텔을 떠난 것이 8시. 태주는 오후 1시가 다 되도록 점심을 먹자는 말 한마디 없이 선사시대 박물관을 돌고 있었다.
레제지 시청 앞 식당은 우연히 찾은 맛집이었다. 페리고르 지방 특선음식은 아니었으나 잘 구워진 피자는 그녀의 입맛을 돌게 했다. 시장이 반찬이었는지 모르겠다. 은서는 맛있는 음식을 한 입 베어 물고 달콤 새콤한 행복도 함께 맛보았다.
‘내가 이렇게 일차원적인 인간이었던가.’
일말의 자책은 잠깐이었다. 맛있는 음식에 마음이 풀어진 은서는 흥흥거리며 맛을 음미했다. 배불리 먹은 점심은 그녀의 마음을 말랑말랑 포근하게 만들어주었다. 후퓌낙에 있는 호텔로 가는 동안 낭창낭창 부드럽고 온화한 페리고르 햇살이 쏟아졌다. 호텔에 도착하는 대로 햇살의 소나기를 마음껏 즐기고 싶어 졌다. 수영장 선탠 의자에 누워 햇살을 즐기며 차가운 화이트 와인을 마시고, 오후 내내 태주와 사랑을 나누고 싶다는 행복한 상상에 젖어 배시시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의 뺨이 카리브해에 지는 붉은 노을처럼 붉어졌다. 까무룩 잠들었던 은서는 태주의 푸조가 주차장에 도착해서야 행복한 얼굴로 깨어났다.
“벌써 다 왔어?”
태주가 가볍게 그녀의 뺨에 키스했다. 부스스 눈을 뜬 은서는 비몽사몽 들뜬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차장에서 바라본 호텔이 너무 낯설었다. 호텔이라기보다 오래된 집을 개조해서 만든 렌트 하우스 같았다. 1층 레스토랑에는 손님들이 북적였다. 주인은 정신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태주가 체크인을 요구하자 방 열쇠를 건네주고 부리나케 손님 테이블로 사라졌다. 세상에, 호텔에는 수영장은 물론이고 엘리베이터도 없었다. 솔직히 어젯밤을 보낸 호텔도 만족스럽지 못했으나 그래도 수영장과 너른 정원이 딸려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햇살을 즐길 공간 하나 없는 민박집 같은 호텔이라니…… 은서는 태주가 자신을 전혀 배려하지 않았다는 생각에 서운해졌다. 3층으로 올라가는 낡은 나무 계단에서는 밟을 때마다 삐걱삐걱 괴성이 터져 나왔다. 조악한 복도를 지나 도착한 룸은 초라한 소공녀의 방을 억지로 꾸며놓은 다락방 같았다. 깨끗하고 정갈하게 정리했으나 가난의 티를 벗어내지 못한 그곳에서 은서는 단 1분 1초도 머물고 싶지 않았다.
태주는 꼭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허둥거렸다. 방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쾅 소리 나게 문을 잠그더니 허겁지겁 그녀를 안았다. 조급함이 서린 그의 얼굴이 외계인처럼 섬뜩했다.
‘어서 이곳을 나가고 싶다고 말해야 해.’
마음과 달리 은서는 가위에 눌린 듯 옴짝달싹 못 했다. 성급하게 그녀의 입술을 찾는 태주의 거친 숨결에서 비릿한 욕정이 타올랐다. 은서는 토할 것처럼 속이 뒤집히며 눈물이 핑 돌았다.
그를 찾아 나선 여행길이었다. 무수한 세월을 거스르며 태주에게 가려고 나선 길이었다. 왜 갑자기 그 길이 험한 골고다 언덕으로 이어졌는지 모르겠다. 길을 잘못 든 것이 분명하다. 그래, 이렇게 그에게로 갈 수는 없다. 은서는 온 힘을 다해 태주를 밀어냈다.
“이러지 마, 피곤해.”
태주를 뿌리치고 침대로 쓰러지는데 왈칵 서러움이 밀려왔다. 자꾸 어그러지는 여행을 곱씹으며 은서는 태주와의 앞날이 짙게 낀 먹구름처럼 불길했다. 어제와 다른 여행을 하겠다던 그는 사소한 약속 하나 지키지 못했다. 은서는 평소대로 따져 들고 싶은 마음을 꿀꺽 삼키며 사랑을 생각했다.
줄리앙과의 삶이 그랬던 것처럼 어영부영 끌려가는 인생은 그녀가 원하던 것이 아니었다. 삶은 현실이다. 태주와 함께할 미래의 주인공은 그녀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사랑의 주인공은 그녀여야 한다. 사랑은 고결해 보여도 치사한 존재다. 아기처럼 맑고 순수한 얼굴을 하고 누가 헤게모니를 장악하느냐를 놓고 피 터지게 싸우는 것이 사랑이라는 놈이다.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사랑의 온도와 깊이도 상관없다. 다만 한 가지,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가 된다는 진실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