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플레이리스트 #13
군산의 어느 밤, 작은 사진관의 유리문이 가볍게 덜컹거린다. 화장을 했어도 소녀티가 차마 다 물러나지 않은 여자 하나가 문틈 사이로 편지를 밀어 넣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자세히 보니 그녀는 방금 밀어 넣었던 편지를 도로 끄집어내려는 중이다. 허나 야속하게도 편지봉투는 기어이 좁은 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바닥으로 탁 하고 착지한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편지 속의 말들은 이제 그녀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심야의 사진관 앞에서 혼자만의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하고 있는 여자의 이름은 김다림(심은하). 이름에서 네모 하나를 빼면 기다림이 되는 그녀는 말 그대로 한 남자를 기다리고 있다.
주차단속요원으로 일하며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일상에 촉촉한 빗방울을 내려준 남자는 유정원(한석규). 유원지와 정원의 중간 어디쯤이 되어줬던 남자는 한 마디 말도 없이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어디로 간 걸까. 나는 그에게 무엇이었던 걸까.
다림의 감정이 상승할 때 정원은 하강한다. 아버지가 운영하던 초원사진관을 물려받은 정원에게 죽음은 이미 삶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그는 점잖게 죽음을 기다리는 중이다.
마침 다시 나타난 첫사랑(전미선)은 정원이 삶의 모든 부분을 남김없이 정리하는 걸 돕기라도 하듯, 감정선에 마침표를 찍어주고 창문너머로 어렴풋이 옛 생각과 함께 사라졌다.
문제는 다림이다. 무더운 여름날, 운명적이지도 로맨틱하지도 않게 사진관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나무 아래서 아이스크림 하나씩을 뜯어먹으며 잠시 서로의 그늘이 된다. 삶의 끝에서 당겨진 조용한 불꽃. 하지만 꺼지기 전의 불꽃도 뜨겁기는 마찬가지다.
정원은 오토바이를 타고 다림 주변을 맴돈다. 함께 거리를 걷는다. 느닷없이 팔짱을 낀 그녀에게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 싱거운 귀신 얘기를 한다. 하루하루 덮쳐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빛으로 잠시 밀어내려는 듯이.
죽음으로부터 등을 돌려 다림을 향해 설 때 잠시나마 상황은 견딜 만한 것이 된다. 그렇기에 다림은 정원에게도 정원이었다.
허진호 감독의 데뷔작 ‘8월의 크리스마스’는 흔히 잔잔한 영화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이 관념은 영화가 개봉하던 당시의 정황과 맞물려 있다. ‘한국영화도 재밌어졌다’는 평가를 받기 시작한 90년대 말의 작품들은 감정을 극단까지 밀어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이 영화가 개봉하기 전 크게 히트한 최진실/박신양 주연의 ‘편지’ 역시 시한부 인생을 테마로 하지만 ‘8월의 크리스마스’와는 완전히 다른 길을 간다. (흥미롭게도 ‘8월의 크리스마스’ 역시 원래 제목은 ‘편지’였다.) 이후에 개봉하는 영화 ‘약속’은 이른바 최루탄 멜로의 전형을 이룬다.
그런 영화들에 비해 ‘8월의 크리스마스’는 상대적으로 잔잔해 보였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내재적으로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우선 한석규와 심은하라는 두 배우의 위상부터가 엄청났다. 당시 충무로에서 제작되는 모든 시나리오가 이 두 배우에게 간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둘은 화려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 캐스팅 됐다는 것만으로도 화제가 됐던 영화의 한 장면 한 장면을 톺아보면 이 작품의 격정이 더욱 선연히 눈에 들어온다. 특히 다림이 그렇다. 길에서 스쳐간 정원이 자신에게로 돌아오기 위해 오토바이를 꺾을 때 조용히 미소 짓는 그녀의 표정은 보는 이의 마음에 충격적일 정도로 울긋불긋한 궤적을 그려나간다.
지금 같아서는 ‘썸’이라는 단어로 간단히 요약될 이들의 ‘사랑과 우정 사이’에는 카카오톡으로 사랑을 말하고 ‘1’의 있고 없음으로 모든 것이 판명되는 지금의 우리와는 너무도 다른 양상의 진동이 있다.
영화의 후반부는 또 어떤가. 이 영화가 잔잔하다는 느낌을 주는 주된 이유는 전체 러닝타임 90분 중에서 후반부 약 20분에는 대사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배우들의 표정과 행동, 그리고 풍경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이 시퀀스는 혜성처럼 등장한 신인 허진호의 연출력과 자신감이 폭발하는 구간이다. 이 20분에서 허진호는 여봐란 듯이 자신의 작품세계를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다른 길을 갈 것이다. 8월과 크리스마스가 맞닿는 세계로 당신을 초대한다.
겨울이 오고 어느 틈에 훌쩍 성장한 다림이 다시 사진관 앞으로 찾아와 미소 짓는 장면은 이 영화를 하나의 성장담으로 훌륭하게 완성시킨다. 이는 정원이 다림의 편지에 적절하게 응답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그는 죽음의 세계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림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을 수 있다. 그래서일까. 다림의 미소는 이미 정원을 닮아 있다.
끝맺음의 측면에서도 이 영화는 고수의 마감처리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과시하고 있다. 이 영화는 그저 잔잔한 영화가 아니다. 인간의 감정 안쪽에서 터지는 황홀한 폭발물들이 도처에 산재한 ‘내향적 감정 블록버스터’다. 20년의 시간을 가로질러 다시 한 번 ‘8월의 크리스마스’를 재생하게 만들어주는 이유도 아마 그 매력에 있을 것이다.
팟캐스트 방송 '호우시절'에서 8월의 크리스마스를 리뷰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