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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음으로 말하는 자들

진리의 얼굴, 호모 사케르의 고백

by Wooin




침묵이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는 순간이 있다. 우리는 말하지 않음으로 말한다. 진리는 몸을 통해 드러난다. 고통받는 몸, 침묵하는 입, 벗겨진 존재. 말해질 수 없는 고통이 침묵으로 응축될 때, 진리는 몸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출현한다. 그것은 논리를 넘어서고, 철학을 넘어서며, 공동체를 넘어선다. 예수는 말하지 않았고,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들었다. 이들이 증언한 것은 이 세계의 어떤 규범이나 원리가 아니라, 배제되는 자의 존재 방식 자체였다. 진리는 권력과 폭력에 의해 배제되고 침묵당한 존재들이, 그 침묵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으로서 그 자체로 하나의 삶이다. 그리고 논리가 아니라 존재의 방식, 말이 아니라 벗겨지는 경험으로서, 침묵과 고통의 방식으로만 드러나는 어떤 불편한 현존이다.


예수는 저항하지 않았다. 그러나 복종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을 죽이는 공동체의 한복판으로 들어가, 그 폭력의 기제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진리를 증언했다. 그의 말은 고요했고, 침묵이었고, 결국에는 외마디 절규였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 부르짖음은 신을 향한 외침이자, 공동체의 외면에 대한 고발이다. 그 외침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진리는 어떻게 침묵 속에서 드러나는가?”



알레테이아(ἀλήθεια) ― 드러남과 은폐, 침묵과 계시 사이에서


이 침묵의 드러남은, 고대 그리스어로 ‘숨겨진 것이 드러나는 것’, ‘은폐로부터의 벗겨짐’을 의미하는 알레테이아(ἀλήθεια)라고 부를 수 있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이 단어를 단순한 진리의 의미를 넘어선 ‘은폐로부터의 벗겨짐’, 존재가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는 계시의 방식으로 재해석했다. 진리는 판단이 아니다. 진리는 사건이다. 그것은 고통 속에서 벗겨지는 피부이며, 죽음 속에서 열리는 시선이다. 그는 말한다. “진리는 정당한 판단이 아니라, 존재의 드러남이다.”


이때 알레테이아는 마치 어두운 방 안에서 천천히 커튼이 젖혀질 때의 순간과 같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스럽게 열리는 것이 아니다. 고통과 침묵을 거쳐야만 드러나는, 폭로로서의 진리다.


예수와 소크라테스는 이 진리를 각기 다른 침묵의 방식으로 드러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법정에서, 예수는 로마의 십자가 위에서. 한 사람은 독배를 들고, 한 사람은 고개를 떨구었다. 둘 다 “악보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태도로, 불의한 법 아래에서 죽는 것을 진리의 방식으로 실천했다. 그들은 논증이 아닌 파루시아(παρουσία, 현존/임재)*, 말이 아닌 존재의 돌출로 진리를 나타냈다. 예수가 공동체 한복판에서 침묵함으로써 드러낸 진리는 바로 이 알레테이아의 가장 급진적인 형태였다. 그의 침묵은 하나의 계시(ἀποκάλυψις), 하나의 진리의 열림이었다.


* 파루시아를 묵시문학에서는 종말의 재림으로 표현하지만, 파루시아의 원어는 임재/현존이라는 점을 잊지 않고 싶다.



말하는 용기(Parrhesia) ― 말함으로 침묵을 드러내는 진리의 윤리


여기서 또 하나의 진리의 방식이 있다. 바로 고대 그리스 철학 전통에서 비롯되어 미셸 푸코가 주목한 ‘말하는 용기’, 즉 파레시아(parrhesia)다. 파레시아는 단순한 발화나 사실의 전달이 아니다. 그것은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자기 자신이 믿는 바를 숨기지 않고 진실을 말하는 윤리적 행위다. 파레시아적 진리는 판단이 아니라, 삶을 건 고백이며, 권력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존재 전체로 진실을 증언하는 행위다.


파레시아에서 진리는 권력의 틈새에서 발생한다. 그것은 공동체의 안정을 해치면서까지 드러내야 할 어떤 불편한 진실이며, 말하는 자는 그 진실을 통해 스스로를 노출시킨다. 진리는 단지 ‘무엇이 참인가’가 아니라, ‘누가 말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말하는 자는 언제나 위험에 처한다. 그는 권력에 의해 침묵당할 수도 있고, 배제되거나 죽임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말한다.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외친 한 문장,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들며 남긴 침묵, 이 모두는 파레시아의 행위였다. 그들은 말하지 않음으로 진리를 말했고, 존재 전체로 진실을 증언했다.


여기서 진리는 더 이상 단순한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자 윤리적 선택이며, 스스로를 벗기는 실천적 행위다. 그것은 언어 이전의 것, 고통의 몸짓과 침묵의 표정 속에서 드러나며, 존재가 존재에게 응답하는 방식으로 출현한다. 진리는 말의 논리보다는 말할 수 없음의 결단 속에서, 자기 고백의 폭로를 통해 생겨난다. 그리고 그 진실은 언제나 권력과 충돌한다. 파레시아는 결국 하나의 윤리적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진리를 말할 것인가, 침묵할 것인가?” 이 질문은 예수와 소크라테스를 지나,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어지는 물음이다.



호모 사케르(Homo Sacer) ― 법 밖에서 말하는 존재


여기서 우리는 조르조 아감벤이 말한 ‘호모 사케르(homo sacer)’라는 존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은 『호모 사케르』(Homo Sacer, 1995)에서, 고대 로마법 속에서 기이한 법적 존재를 찾아낸다. ‘호모 사케르’란, 법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면서도, 제의적으로도 희생될 수 없는 존재다. 다시 말해, 그는 죽일 수는 있지만, 희생제물로 바칠 수 없는 ‘살해 가능한 생명’이다. 그는 공동체로부터 법적으로 배제되었지만, 죽임은 당할 수 있는 자. 제의에도, 법에도 속하지 않는 자. 이 경계인의 존재는 공동체의 심연을 드러내며, 권력의 작동 방식 자체를 폭로한다.


예수는,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바로 이 호모 사케르의 방식으로 말하지 않음으로 진리를 말했다. 공동체로부터 배제되었지만, 죽임당할 수는 있었던 존재. 공동체의 경계에서 말살당하는 자. 아감벤이 보여주고자 한 것은 이것이다: 현대의 정치적 공동체 또한 끊임없이 ‘호모 사케르’를 생산한다. 예수처럼, 소크라테스처럼, 그리고 오늘의 우리처럼.


아감벤은 이렇게 말한다. “호모 사케르의 운명은 더 이상 예외적인 것이 아니다.” 그리고 “현대의 주권은, 누가 살아야 하고 누가 죽어도 좋은지를 결정하는 권력이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든 ‘죽어도 괜찮은 생명’으로 간주될 수 있다. 정체성 때문에든 배제될 수 있는 존재들이다. ‘모든 사람들이 호모 사케르다’는 말은 이 문명 자체가 배제 위에 세워져 있다는 근본적인 폭로다. 그것은 슬로건이 아니라, 문명의 어두운 자화상이다. 동시에, 그 배제 속에서 새로운 윤리적 사유가 시작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교차성과 고유성의 소수자성


그리고 이 배제는 단순히 동일한 조건이 아니다. 그것은 각자의 방식으로 드러나는 고유한 배제, 교차적 억압이다. 우리가 겪는 차별은 성별, 인종, 계급, 장애, 언어 등 다양한 차원에서 교차하며 형성된다. 이 개념을 교차성(intersectionality)이라 부른다. 교차성(intersectionality)은 킴벌리 크렌쇼(Kimberlé Crenshaw)가 제시한 개념으로, 인종, 성별, 계급, 장애, 종교 등 다양한 정체성이 서로 교차하면서 독특한 억압의 구조를 만든다는 사유다. 이 교차성 개념은 미학적으로도 우리에게 중요한 통찰을 준다.


교차성은 우리 모두가 단 하나의 정체성으로 환원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모든 존재는 동일하지 않다. 모든 존재는 고유하다. 그리고 바로 이 고유성은 우리가 ‘소수자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증거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들이 호모 사케르다’는 말은 단지 보편적 희생의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고유한 방식으로 배제되고 있다는 진리를 보여준다.


이 고유성은 단지 피해의 총합이 아니다. 호모사케르는 얼굴이 지워진 얼굴이다. 이 비형상성("형상 없는 형상")은 Imago Dei(하나님의 형상)과의 역설적인 접점을 갖는다. 기독교적 전통에서 Imago Dei는 인간이 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음을 뜻한다. 그러나 예수는 신의 형상을 자발적으로 비워낸(케노시스) 존재였다. 이 자기 비움은 곧 모든 고유한 존재가 가진 신적 흔적이며, 그것이 바로 진리의 가능성이다. 우리가 모두 고유하다면, 우리는 모두 형상이 없는 형상으로 존재하며, 그것은 곧 배제될 수 있는 가능성이자, 동시에 진리를 증언할 수 있는 존재의 조건이다. 비워졌기에, 그 형상은 더 이상 형태로 보이지 않지만, 벗겨짐의 방식으로 드러난다. 이 형상 없는 형상은 곧 호모 사케르의 존재론, 말하자면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자리다.



다중(multitude) ― 배제된 존재들의 공명


그리고 이 질문은 결국 다중(multitude)이라는 철학적 지형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는 ‘다중’을 서로 다른 고유성들이 얽히며 공명하는 존재들의 집합이라 말한다. 그들은 동일하지 않지만, 공통적으로 배제되고 침묵당한 경험을 가진 자들이다. 진리를 논쟁이 아니라 삶의 상처로 말하는 이들. 그 다중의 몸짓이, 오늘 우리 시대의 예언자들이다. 다중은 단일한 민족, 계급, 성별로 환원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 다른 삶의 방식, 고통, 정체성, 차이를 지닌 존재들이 각자의 고유성 속에서 공명하는 존재 집단이다. 다중 개념을 통해서 네그리와 하트는 현대 사회에서 비가시화되고 배제된 수많은 존재들의 연대 가능성을 제시한다.



진리는 누구의 얼굴로 드러나는가


그래서 진리는,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 배제당한 우리의 몸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말하지 않음으로 말하고, 복종하지 않음으로 저항하며, 드러내지 않음으로 드러나는 침묵의 언어. 그것은 구조 속에서 벗겨지고, 드러나고, 죽임당함으로써 발생한다. 진리는 단지 참된 판단이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 드러내는 윤리적 사건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 진리를 증언할 수 있는 존재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고유하고, 각자의 방식으로 소수자이며, 호모 사케르이기 때문이다. 배제된 자들, 얼굴을 지운 자들, 이름을 잃은 자들. 바로 그들이 진리의 입구에 선다.


진리는 더 이상 ‘무엇이 참인가’가 아니라, ‘누가 말할 수 있는가, 누가 말하지 않음으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진리는 광장에서 외치는 것이 아니라, 침묵 속에서 스스로 타오르는 불이다. 우리는 그 불에 입을 데이고, 눈을 뜨며, 몸으로 진리를 배운다.


진리는 뜨거운 불처럼 우리 곁에 있다. 침묵하는 말, 고통의 얼굴, 비워진 형상.


진리는 우리에게 말한다.

“너는 어떤 방식으로, 말하지 않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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