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를 경유하며..
여름 방학을 계기로 한국에 잠시 들어갔다가 한국에서 두 달을 보내게 되었다.
코로나 방역의 기준이 완화 되긴 했지만, 아직 여행에는 많은 불편함이 따른다.
예전에 가능했던 여행이 어느덧 허가와 비슷한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 번거롭지만 여행은 언제나 설레는 것이다. 미국 입국기준(22년 8월 31일 기준)에 의하면 코로나 음성 기록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입국할 때는 통상적으로 하던 것과 같이 도착후에 ESTA 셀프 수속을 한 뒤, 이민국 직원의 간단한 문답을 거치면 입국이 완료된다. 캐나다에서 학업을 하고 있다라는 이야기와 경유로 관광을 하려고 한다고 하니, 캐나다 비자를 보고 바로 스탬프를 찍어 주었다. 미국은 캐나다보다 더 마스크를 쓰는 사람들이 없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실내이건 실외이건 마스크를 쓴 사람을 만나는 게 손꼽을 정도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밴쿠버도 점점 그런 모습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
오랜만에 해보는 관광.
북미 도시들이 대부분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고, 북미 관광이 대자연을 보는 것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샌프란시스코는 관광지로서 흥미로운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여행의 정석이라고 하는 금문교 / 소살리토 / Pier 39, 피셔맨스 와프(Fisherman's Wharf), 롬바드 스트리트 / 차이나타운과 유니언 스퀘어 / 미션 디스트릭트로 나뉘어 보면 구역 내에서는 도보로도 관광이 가능하고, 샌프란시스코의 명물이라는 트램으로도 풍요로운 경험들을 할 수 있다 ($8). 어업이 계속되는 곳이기 때문에 크랩 등 해산물 요리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고, 이민자의 공간이니 만큼 다양한 요리들을 만날 수 있는 점도 장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과학의 프레임으로 보면 이 공간에 누적된 사람들과 역사의 무게가 결코 적지 않다. 이번 여행에서 높아진 물가들을 보면 미중 패권 다툼과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촉발된 탈세계화(De-globalization)의 흐름 속에서 세계 곳곳의 서민들의 삶들은 어떻게 변할 지 걱정되는 부분이 많다.
지금까지 저렴한 제품을 손쉽게 구입할 수 있는 배경에는 저개발 국가들의 저임금 노동을 이용한 글로벌 밸류 체인이 있었고, 북미로 더욱 한정지어 보면, 사람들의 식탁에 올라오는 식자재 값이 이렇게 저렴한 것은 이들이 농업에서 저렴한 중남미 노동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과 반대로 서구 극우 정치인들이 구사하는 언어가 팍팍한 서민들의 삶과 만나며 증오가 되고 이게 정치적 포퓰리즘으로 변화하고 있는 지점이 안타깝다.
캘리포니아 와인 산지 나파 밸리는 와인을 테스팅하고, 와이너리의 고즈넉한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곳이지만, 눈을 조금 돌려보면, 여기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민자 혹은 외국 노동자 출신이다.
최근 주목 받고 있는 미국의 반중국 정서는 비단 오늘날의 문제가 아니다.
캘리포니아에는 1800년대 중후반에 중국이민자들이 대거 유입되었는데, 이들은 잘 알려진 대로 북미의 도로와 철도를 건설하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차별은 미국 이민역사의 결정적 오점을 남기는데, 유럽이민자들이 비교적 쉽게 입국이 허용되었던 반면, 태평양을 건너오는 아시아 이민자들은 엔젤 아일랜드라는 구류 시설에서 최장 22개월간의 취조를 받았다. 이미 19세기에도 차이나타운은 질병의 소굴로 언론에서 부르기 시작했다. 이런 문화 속에서 북미에서 가장 큰 차이나타운인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은 북미 최초의 격리(Segregation) 구역이 되었고 미국은 더 나아가 중국이민을 제한한다(Chinese Exclusion Act).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20세기 초반부터 시작된 한인이주민들과 샌프란시스코에서 펼쳐졌던 독립운동의 고달픔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지금은 많이 유명하고 그만큼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피셔맨스 와프(Fisherman's Wharf)는 골드러시를 통해 들어온 이탈리아 어부들이 생업을 하던 공간인데 1970-80년대 관광지로 변모하게 된다. Pier39에 가는 길에 보이는 몇몇 이탈리아 레스토랑들 역시 그들의 흔적이 묻어있다.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The Golden Gate Bridge)는 조세프 스트라우스가 1917년 디자인 했지만, 1933년에 공사에 들어가서 1937년에 개통된 것이다. 당시 미국 경기가 불황이어서 실업률이 극심했기 때문에, 많은 노동자들이 몰렸지만, 엄청난 높이 (데크 높이만 해면 67미터 / 높이 227미터)위에서 해야 하는 공사 덕에 많은 노동자들이 희생되었다. 증언에 의하면 연무가 심한 지역인데 안개가 끼면 철판이 얼음 위처럼 미끄러웠다고 한다. 지금 그들의 노고 위로 연평균 4천1백만대의 차가 건너고 있다.
잘 갖춰진 북미의 도시들을 조금만 들춰보면 기반시설의 중심에는 이민자들의 노고와 희생이 있었고, 이는 현재도 진행형이다. 이런 대도시들 뿐 아니라 캐나다의 작은 도시인 호프만 가보더라도, 이민자들이 건설한 터널과 철도들의 기록이 나타난다. 세계는 놀랄만큼 연결되어 지탱되어 왔다. 그래서 탈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지금 천정부지로 치솟는 물가는 역설적으로 우리 모두가 세계화라는 질서 안에서 하루하루를 살아온 팍팍한 서민들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렇게 샌프란시스코는 아름다운 크기만큼 이민자들의 노곤한 일상이 겹겹이 쌓여 빛나는 도시이다. 최빈국가 출신의 아시안으로, 또는 나라를 빼앗긴 땅의 사람으로서 20세기 들어온 중국인과 한국인이 견뎌내야 했던 삶의 무게는 어느 정도 였을까?
세계적인 명성의 스탠포드 대학교, 그리고 애플과 구글과 메타의 본사가 있는 실리콘 밸리의 한편에 당시 노동자들이 경제난에 목숨을 걸고 만든 다리가 가로지르고, 중남미 이주 노동자들의 노력으로 와인의 향기가 가득하면서도, 북미 최대의 차이나타운이 있는 이 곳. 한번 즈음 시간이 쌓아놓은 이 많은 레이어들을 생각해 본다면 이 곳은 북미 도시 중에서는 제법 볼거리와 생각할 거리가 참 많은 도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