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미씨의 명절 - 시어머니와 불화 1
보미씨는 요즘 아들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다.
그런데 조만간 추석 연휴가 닥치면 친척들의 자랑들이 밀물처럼 밀려올 텐데
벌써부터 생각하잖니 배알이 꼴려 암담하다.
보미씨는 평소 명절에는 며느리의 의무를 잘 지켜왔다. 하지만
자식인 아들이 갈 대학이 없어 아들의 미래가 걱정이 돼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래서 이번 명절은 달갑지가 않다.
그럼에도 이번 명절에 어떻게 지낼 건지 무엇을 먹을 건지 이것저것 대화를 나누고자 80대 노모인 시어머니께 전화를드렸다.
"오, 그래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다."
"어머니, 이번 명절에 뭐 드시고 싶은 게 있나요? 제가 이것저것 준비하려고요"
"그래, 작은아들네는 작은아들만 내려오라고 했다. 네 동서랑 아이들은 아프니까 내려오지 말라고 했다. 나는 아무것도 안 하련다. 이제 늙어서 준비도 못하겠다."
"어유, 어머니. 준비하지 마세요. 제가 다 알아서 하니까요. 근데 서방님만 내려오고 동서랑 아이들은 안 내려온다고요? 그럼 이것저것 준비할 것도 없겠네요. 간단하게 해야겠어요."
그렇게 가닥을 잡은 보미씨는 마지막으로 아들 이야기를 툭 꺼낸다.
"지금 우리 지훈이가 대학 원서를 쓰는데 너무 공부를 안 해서 이 녀석을 받아 줄 학교가 있으려나 모르겠어요. 안 그래도 이번 추석연휴까지 저도 아들 녀석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아요. 남편이랑 이야기해서 지방 국립대 두 군데에 썼는데 좀 붙었으면 좋겠어요."
"그냥 두면 지들이 알아서 잘 살 것이다. 봐라. 네 작은 형님은 꾸준히 자기 일 하더니 이번에 센터장이 되어서 비서도 생기고 기사도 딸리고 얼마나 좋아. 그리고 네 작은 형님 아들이 이번에 대학원을 도쿄대에 붙었다더라. 다 자기 일을 꾸준히 하면 언젠가는 잘 된다더라."
보미씨는 순간 어라? 방금 내 아들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어머니는 본인 자식 이야기를 하시는구나 생각에
마음이 불편했다.
"와, 어머니 축하드려요. 형님과 손주가 아주 잘 되어서 기쁘시겠어요."
어머니는 곧 당황하더니 이내 말을 고친다.
"아니, 우리 지훈이도 그런 짜잔 하고 시골 촌구석 대학을 보내지 말고 도시에 있는 학교를 보내는 게 어떻겠냐. 왜 아들을 그런 짜잔한데 보내려고 하냐."
보미씨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짜잔 하고 시골 촌구석에 있는 대학에 보미씨의 첫째가 다니고 있고 그 둘째인 지훈이도 같은 대학에 지원한 참이었다.
그런데 숨겨왔던 사람의 본심을 읽어버린 것 같아 보미씨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작은 형님의 아들은 도쿄대 가서 안 그래도 붙을지 말지 하는 우리 집 아들은 걱정은커녕 외손주 자랑을 늘여놓는 어머니의 말씀을 듣자니 보미씨는 이번 추석이 영 즐겁게 보낼 것 같지 않았다.
"어머니, 우리 아들은 붙을지 안 붙을지 모르는 상황이고요. 아범이나 저도 그 지방대 출신이에요. 짜잔 하고 시골 촌구석 대학출신.. 워낙 공부를 안 해서 어느 대학이든 우리 아들 입학만 시켜준다면 저는 너무 감사할 것 같아요." 그리고 대화를 마친 보미씨의 감정은 폭풍전야 같은 불길한 기운이 감싸고 있었다.
그날 밤
남편과 만난 보미씨는 오늘 있었던 어머니와의 대화를 꺼냈다.
"어머니 좀 너무 하셔. 아무리 우리 자식들이 공부를 못한다고 하지만 지방의 짜잔 하고 촌구석 대학을 보낸다고 말씀하시고는 작은 형님 아들 도쿄대 붙었다고 자랑을 하셔야겠냐고.. 더구나 우리 큰애가 다니는 대학을 평소에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알 것 같아. 할머니라면 응원해 주면 안 되냐고. 어느 곳에 가든 네가 잘 될 것이다 응원해 주면 안 되는 거냐고.. 도쿄대 입학했다는 손주를 보니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비교가 되었겠어.
도쿄대 축하해주고 싶은데 울 아이들을 그런 취급을 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나쁘네."
남편도 같이 듣다 보니 본인의 자식에 관련된 말이라 쉽게 어머니 편을 못 들겠는지 이내 한숨을 푹푹 쉰다.
"어머니는 가끔씩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말씀하시곤 해, 당신도 인정해야 해.. 시골 촌구석, 짜잔한 대학 맞잖아."
"당신 말이 맞아, 남들이 우리 아이들이 어느 대학을 가든 평가를 하든 그건 남의 이야기이고 우리는 정작 가족이잖아. 어느 곳에 가든 우리는 아이들을 응원해 줘야지. 남들이 우리 아이를 평가를 해도 당연하게 속 쓰리지만 받아들이는 거고, 하지만 우리마저 자식들을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잖아. 아이들이 이제 시작이니까 포기하지 말고 잘 살도록 응원해야지 "
남편도 보미씨도 결국엔 끙하며 속이 쓰리지만 어쩔 수 없다며 고통을 함께 감내하자 다독였다.
그리고 그다음 날 보미씨는 남편에게서 어머니가 크게 분노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시동생이 서울에서 내려와 남편은 어머니와 함께 셋이 저녁을 먹었더란다.
남편이 어머니에게 "며느리한테 짜잔 하고 시골 촌구석 대학을 보내지 말라는 말 하지 말라고 " 했다가
어머니가 부들부들 떨며 "내가 자식 같아서 하는 소리 었는데, 나는 다시는 명절이고 뭐고 며느리 안 보련다"
하시며 눈물이 나올 것처럼 분노를 하셨다고 한다.
보미씨는 남편에게 전해 들은 어머니 소식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결혼생활 22년 동안 어머니가 분노를 하신 경우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당신이 자랑스러운 며느리 었는데 그 말은 생각해서 했던 말인데 당신이 그걸 오해하고 들어서 어머니가 많이 서운하시대. 어머니도 당신에게 서운한 점이 많은데 다 참고 계셨다고 하더라고.."
사람은 서로 만족할 수가 없다. 보미씨도 알고 있었던 사실이고 금기처럼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내뱉지 않는 것이 시댁과 며느리사이의 불문율처럼 서로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보미씨는 어머니가 걱정이 되었다.
"왜 그런 소리를 했어. 나야 내뱉을 수 있는 사람이 남편밖에 없으니 우리 자식일이라 꺼낸 이야기지만 왜 당신이 어머니에게 뭐라 하냐고, 그냥 두지 왜 일을 크게 벌였어. 나 이제 어떻게 얼굴 보냐고"
"어머니도 혼자 사시면서 우울증이 생기셨는지.. 나도 울 엄마가 저렇게 약해지셨구나 싶고 너무 엄마가 울 것 같아서 그래서 후회했어. 더 이상 엄마를 몰아붙일 수가 없었어. 엄마는 너한테 서운했던 게 도쿄대 보냈다던 작은 누나에게는 왜 몇 년 전에 왜 사과박스를 안 보냈냐고 하더라."
보미씨는 어머니께 미안했다가도 그 생각이 싹 달아나버렸다.
"사과라니?"
"몇 년 전에 우리 동생하고 큰누나하고 어머니한테는 네가 사과를 보냈는데 작은 누나한테만 안 보냈다고 엄마가 그 이야기 꺼내시던데? 섭섭하다고?"
이 무슨 소리지? 몇 년 전 일을 기억도 안 나는데? 보미씨는 참으로 황당했다.
어머니는 결국 또 본인 자식 때문에 나한테 섭섭하다는 걸,, 고작 며느리가 자식 같아서 했다는 말은 얼마나 이중적인가? 보미씨가 자식이야기 할 때 어머니도 본인 자식이야기를 꺼내시는데 나는 여전히 그녀와 라이벌인가? 하 웃음이 나온다.
"여보, 그때 왜 사과를 안 보냈는지 나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도 분명 이유가 있었겠지. 당신 작은 누나는 내 전화를 잘 받지도 않고 그리고 사람이 이야기를 안 하면 모른다고 하지만 당신 누나도 나 빼고 맛있는 거 자기 큰언니랑 나눠먹고 우리는 그냥 꿔다 놓은 보릿자루 취급이 한 두 번이 아니야.. 아주 지난 일을 가지고 섭섭하다 하면 우리도 그 세월 동안 서운한 일들이 많지, 말을 안 할 뿐, 그런데 어머니는 결국 그 사과 박스 안 보낸 게 두고두고 맘에 걸리고 섭섭했던 거구나."
그럼에도 놀라운 사실이 또 벌어졌다.
어머니가 며느리 보기 싫다고 큰 딸 집으로 가버리셨다.
추석 연휴에 보미씨는 차례상 차릴 생각에 장 보기 목록을 체크하던 중에 어머니가 큰 누나 집으로 가셨으니
얼마나 내 흉을 볼까 생각에 맘이 편치 않았다.
역시 어머니는 정작 말을 전달한 남편에게 화가 난 게 아니라 남인 며느리가 그렇게도 서운해서 미우시구나. 나는 뭘 해도 섭섭한 걸 말할 수 없는 사람이고 항상 어머니의 말씀에 서운해서도 안 되는 사람이었구나. 하지만 이제 시대가 변했어. 보미씨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어머니가 내 얼굴을 안 본다고 하셨지? 제발 그 기도가 이뤄지길 저도 비나이다 비나이다.
어머니의 그 소원이 꼭 이뤄지길 비나이다 비나이다, 어머니 저는 얼굴 안 보겠다면 하면 솔직히 말해서 땡큐랍니다. '
그럼에도 보미씨는 어른이니까 시골 촌구석에서 명절이라고 오는 큰애와 작은 애를 위해서 명절 장을 분주히 보고 혹시 모를 산소에 갈 수 있으니까 열심히 요리를 한다. 명절은 명절다워야지 아무래도 손가락 쪽쪽 빨며 가만히 있을 수 없으니까 하며 올 추석엔 시댁 얼굴 진짜 안 볼 수 있을까? 미래를 궁금해하며 스트레스받지 않기로 한다.
'나는 mz엄마니까 mz엄마답게 어르신이 하는 말에 신경 쓰지 말고 올 추석에 우리 아이들하고 맛있는 거 먹고 외조부모와 외사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야겠다. 물론 어머니를 만나 뵈어도 마음을 달래 드려야지 별수 있나? 스트레스받지 말고 보미야, 인생사 어찌 네 마음대로 되겠니. 그냥 네가 어른이니까 네가 중심이니까 너에게 기대는 맘도 커서 그런 거라 생각해. '
보미씨는 과연 명절을 어떻게 보내게 되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