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탕 이야기 | 삼각 커피 우유

by 우딤




사람들이 목욕탕에 관한 추억을 이야기할 때마다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바나나우유다. 대한민국 모든 사람과 목욕탕 토크를 해본 건 아니지만, 아마 열에 여덟은 바나나우유를 마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머지 둘은 바나나우유를 제외한 다른 음료들의 집합일 테고. 미에로화이바, 포카리스웨트, 박카스, 커피우유, 요구르트 등등. 우리 가족은 늘 커피우유를 마셨다. 삼각형 투명 팩에 담긴 우유. 그걸 커피 포리라고 부른다는 것을 한참 후에 알았다. 엄마도 나도 '삼각 커피'라고 불렀으니까. 네모난 종이팩에 든 것보다 세모난 투명팩에 든 것이 훨씬 맛있게 느껴졌다. 조금 더 어른의 맛이랄까.


삼각 커피 우유를 마시려면 준비물이 필요하다. 바로 가위. 종이팩과 달리 질기고 두꺼운 비닐이라 꼭 가위를 필요로 한다. 빨대 끝으로 한 번에 뚫어보려 온갖 방향으로 공격해도 가위가 아니면 안 된다. 일회용 샴푸 같은 것을 주욱 늘어놓고 파는 매대 앞에 서서 "아줌마 가위 좀 주세요."라고 외치면 매대 안쪽에서 빨간 플라스틱 손잡이의 커다란 가위가 툭 나왔다. 그걸로 한쪽 모서리를 톡 잘라낸 뒤 하얀색 빨대를 쏙 꽂아 엄마에게 가져가면 미션 완료. 구멍을 너무 크게 낼 필요도 없고 빨대가 들어갈 정도로만 작게 자르는 게 포인트이다. 구멍을 크게 내면 화산 폭발하듯 우유가 솟구칠 수 있으니 꼭, 꼭 작게.


바나나우유든 미에로화이바든 커피포리든 사실 목욕탕에서 뭘 마셨느냐가 중요한 건 아니다. 중요한 건 한 손에 다 잡히는 음료수 하나에서 추억을 떠올린다는 것이다. 그 추억은 기억의 서랍을 뒤져 끄집어내고야 마는 것이 아닌, 서랍 바깥쪽에 떡하니 붙어있는 스티커 같은 것이다. 평소엔 생각도 안 하고 살다가 우연히 마트 유제품 코너에서 발견했을 때처럼, 야식 먹으러 편의점에 갔더니 다른 우유는 다 팔리고 외롭게 혼자 남아있는 녀석을 발견했을 때처럼. 발견하는 순간 그 추억은 선명해진다. 그래 맞아, 이거.


독립을 하고 엄마와 멀리 떨어져 살다 보니 찜질방이든 목욕탕이든 혼자 다니게 된 뒤로는 어째서인지 커피포리를 마시지 않게 됐다. 이젠 업소용 냉장고에 진열된 팩 음료수 보다 카페에서 내 이름을 불러주는 맞춤 음료에 더 마음이 가기 때문일까. 이제 20년의 추억이 깃든 삼각 커피 우유를 사는 순간은 내가 엄마와 함께 있을 때뿐이다. 이건 내 추억이 아니라 엄마와 나의 추억이다. 가위로 한쪽 모서리를 톡 자르고 하얀색 빨대를 쇽 꽂아 쪽쪽 빨아먹는 건, 엄마와 있을 때만 할 수 있는 일이 되어 버렸다. 혼자서는 영 그럴 기분이 나지 않는달까. 이젠 엄마에게 삼각 커피 사갈까?라고 물어보면 지겨워서 싫다고 대답하지만 그 세모난 우유 한 팩에 얽힌 많은 날들은 엄마의 마음속에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서랍 바깥에 붙어있는 스티커처럼, 약간은 빛바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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