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탕 이야기 | 고수의 준비물

by 우딤



슬기로운 목욕탕 생활에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대중목욕탕에 익숙하지 않은 지인들에게 물어보니 예쁜 목욕바구니, 때르메스(벙어리장갑처럼 생긴 마법의 때타월), 헤어캡 등의 답이 돌아왔다. 몇 개월 전이었다면 나도 아마 그런 물건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보고야 말았다. 거의 매일 출근 도장 찍듯 목욕탕을 드나드는 진짜 고수들의 준비물을.




1. pvc 방석

2. 방수 랩 스커트

3. 텀블러




언젠가부터 여자들 엉덩이 밑에 깔린 방석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딱 본인 엉덩이 만한 크기의 네모나고 얇은 방석은 무늬도 색도 화려했다. 온라인 쇼핑몰 상품 검색란에 '사우나 방석'을 검색했더니 어마어마한 양의 상품이 인기순으로 나열됐다. 목욕탕 방석, 사우나 방석, 경량 매트, 등산 방석, 방수 방석 같은 키워드로 범벅된 그것은 내가 목욕탕에서 봤던 그 방석이 맞았다. 더 알아보니 재질은 pvc로 방수 기능이 있고 먼지든 뭐든 닦아내고 털어내기 용이해 오염이 잘 되지 않다고 한다. 무엇보다 저렴하고 가벼워 등산이나 목욕탕, 계곡 등등에서 사용하는 사람이 많다. 단 한 번도 등산을 해보지 않은 나는 그 방석을 목욕탕에서 처음 봤다. 수건처럼 두 번 혹은 세 번 접힌 방석은 여자들 옆구리에 끼워지거나 목욕바구니에 길게 꽂혔다. 그리고 필요할 때마다 목욕탕 의자, 습식 사우나실에 있는 인조 대리석 벤치 위에 펼쳐졌다. 탕 안을 제외하고 엉덩이를 댈 수 있는 자리면 어디든 깔렸다. 습식 사우나 벤치에 엉덩이를 델 뻔 한 뒤로, 자신이 사용한 목욕탕 의자를 물로 헹구지도 않고 그냥 갖다 놓는 사람을 본 뒤로 그 방석이 정말 요긴해 보이기 시작했다.

방수 랩 스커트는 조금 더 '찐템'인데 단순 목욕보다는 탕 내에 있는 사우나를 이용하는 사람에게 아주 유용하다. 랩 스커트를 촥- 소리 나게 펼쳐 허리에 두른 뒤 사우나실로 들어가는 여자들의 뒷모습을 보면 '찐이다'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창피하게도 텀블러는 학생들이나 회사원들만 사용한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엄마에게 텀블러를 산다고 했더니 집에 물통이 잔뜩인데 뭐 하러 또 사냐고(심지어 일반 물통보다 훨씬 비싸다) 한소리 들었던 경험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른들은 텀블러를 쓰지도 않고 텀블러가 왜 좋은지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본격적으로 목욕탕에 미쳐버린 뒤, 여탕 안에 줄지어 선 각종 텀블러를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목욕탕에서 플라스틱 물통에 식혜나 감식초, 냉커피 등을 담아 팔기도 하지만 텀블러의 보냉기능을 한번 맛본 사람이라면 플라스틱 물통을 사절하게 된다. 목욕탕에서 최소 한 시간 이상 있는 사람들은 얼음이 잘 녹지 않는 텀블러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목욕을 끝내고 탈의실로 나오면 알몸의 어머니들이 이 텀블러가 네 거냐, 저 정수기 위에 있는 건 누구 거냐, 잃어버리지 않게 잘 챙겨라 하며 신경을 써주기도 하고 본인 텀블러의 용량에 대해, 음료가 새지 않는 튼튼한 뚜껑에 대해, 예전에 쓰던 것보다 훨씬 가벼운 무게에 대해 자랑을 하기도 한다. 어머니들의 텀블러엔 감식초와 함께 수다 한 수푼이 들어있다.


목욕탕 매점에서 산 커피 우유를 텀블러에 넣고 매점 아주머니께 부탁해 얼음을 얻었다. 온탕과 냉탕을 몇 번이나 오가고, 비록 아직 pvc 방석이나 방수 랩 스커트는 없지만 습식 사우나실에도 들어가 서성여본다. 마무리 샤워를 하고 나올 때까지도 텀블러 속 얼음은 여전히 남아 동동 떠다닌다. 귀여운 오렌지 무늬가 프린팅 된 pvc 방석을 조만간 사기로 마음먹고 머리를 말리면서, 평상에 놓인 목욕바구니를 슬쩍 쳐다본다. 또 내가 모르는 새로운 고수템은 없어 보인다. 목욕바구니 대신 다이소 파우치를 들고 다니는 나는 아직 하수이지만 조만간, 때르메스와 PVC 방석을 들고 ‘중수의 길’에 발을 들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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