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맥잔 오간 테이블 위에서 드러난 노동시장의 미래
주가 너머의 미래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과 엔비디아 CEO 젠슨 황이 서울의 한 깐부치킨 매장에서 마주 앉았을 때, 많은 사람은 먼저 주가부터 떠올렸을 것이다. 현대차가 오를까, 엔비디아와 손잡으면 어느 종목이 수혜를 볼까. 이런 뉴스는 대개 그렇게 소비된다. 하지만 저 장면을 그렇게만 읽으면 반밖에 못 읽는다. 저 만남은 투자 뉴스인 동시에, 앞으로 어떤 일이 줄고 어떤 사람만 더 필요해질지를 보여주는 노동시장 뉴스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흔히 기회를 놓칠까 봐 불안해한다. 자산시장에서는 이런 마음을 소외 불안(FOMO·Fear of Missing Out)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지금 더 눈앞에 다가오는 것은 어쩌면 다른 종류의 불안일지 모른다. 내가 놓칠 주식 종목이 아니라, 내가 하던 일이 점점 덜 필요해지고 어느 순간 뒤로 밀려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최근 이런 불안은 도태 불안(FOBO·Fear of Becoming Obsolete)이라고 불린다. 지금 한국 사회가 더 진지하게 읽어야 할 것은 어쩌면 이쪽이다.
현대차는 '한국 자동차 회사'라는 세 마디로 끝나는 존재가 아니다. 공장이고, 부품사이고, 협력업체이고, 노조이고, 연구소이고, 지역경제다. 그래서 현대차가 무엇을 바꾸려 하는지는 신차 한 대의 문제가 아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줄고, 밀려난 사람들은 어디로 가게 될지와 이어지는 문제다. 이번 치킨집의 만남을 한낱 기술 뉴스로만 보면 놓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노동의 개념이 바뀌고 있다
이 만남은 단순히 더 빨리 더 많은 차량을 만들어 판매하려는 목적이 아니다. 쉽게 말해 현대차가 만든 자동차에 엔비디아의 연산 능력이 얹히는 구조다. 그렇게 달리는 차량은 도로 위에서 데이터를 모은다. 판매 대수와 운행 지역이 늘어날수록 경로와 기후, 도로 환경에 관한 데이터도 함께 쌓인다. 그렇게 축적된 데이터는 자율주행 시스템을 더 정교하게 만드는 밑바탕이 된다.
핵심은 현대차그룹이 지금 내놓는 구상이 자동차 한 대를 더 똑똑하게 만드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현대차그룹은 올해 초 미국의 대형 전자·기술 박람회 CES에서, 차만 만드는 회사가 아니라 로봇과 인공지능으로 공장과 물류, 작업 현장까지 함께 바꾸겠다는 계획을 공개했다. 회사 설명만 들으면 사람과 로봇이 더 잘 협력하는 미래처럼 들린다. 하지만 생활의 언어로 바꾸면 뜻은 더 분명하다. 사람이 하던 일을 로봇과 인공지능이 더 많이 맡고, 같은 일을 더 적은 인원으로 해낼 수 있는 구조를 그룹 전체로 넓혀가겠다는 이야기다.
말만 한 것도 아니다. 현대차그룹은 보스턴다이내믹스의 휴머노이드 로봇을 2028년부터 미국 조지아 공장에 투입할 계획을 내놓았다. 처음에는 부품 순서를 맞추는 반복 작업부터 맡기고, 이후에는 더 복잡한 조립 공정으로 넓혀갈 시간표도 제시했다. 기사에 실린 내용들은 '언젠가 이런 것도 가능하다'는 장밋빛 미래를 그린 홍보가 아니다. 어느 일부터 사람 대신 기계에게 넘길지, 그 순서가 짜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대목은 제조업 공장 안에서 어떤 직무가 먼저 자동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일정표로도 읽어야 한다.
한국 제조업을 대표하는 현대차그룹의 변화는 완성차 공장 한 곳의 효율화로 끝날 일이 아니다. 현대차와 기아가 차를 만들고, 현대모비스가 부품과 제어를 붙이고, 현대글로비스가 물류를 돌리고, 오토에버와 42 dot이 소프트웨어와 데이터를 다루는 구조에서는 한 번 검증된 기술이 그룹 안을 따라 빠르게 번질 수 있다.
엔비디아에게 현대차그룹은 단순한 기업 고객이 아니라, 현실 세계의 일을 학습하고 시험하고 배치를 테스트할 수 있는 거대한 실험장에 가깝다. 그래서 이 연합의 의미는 자동차가 더 똑똑해진다는 데 있지 않다. 자동차·부품·물류·공장·로봇으로 이어진 일하는 방식과 사람의 역할이 한꺼번에 다시 정의되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현대차 노조가 이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노조가 걱정하는 것은 로봇 한 대가 공장에 들어오는 장면 자체가 아니다. 그 뒤에 따라올 일자리 문제다. 회사가 로봇을 현장에 들이는 순간, 문제는 기술 도입이 아니라 정원 수를 다시 계산하는 일이 된다. 어떤 자리는 남고, 어떤 자리는 줄고, 어떤 일은 아예 다른 방식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건 노조가 새 기술을 무조건 거부한다는 식으로 단순하게 볼 일이 아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변화를 두고 앞으로 일하는 방식이 조금 달라지겠지 정도로 여긴다. 하지만 더 먼저 닥칠 가능성이 큰 것은 일할 자리 자체가 줄어드는 것이다. 수년 전부터 전 세계 거대 기술기업들은 인공지능에 막대한 돈을 넣는 동시에 인력도 줄이고 있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고용은 줄어드는 흐름이 여러 산업군에서 포착되고 있다.
현대차그룹 안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 공장에서는 로봇과 함께 일할 수 있는 일부 숙련 인력만 더 중요해질 수 있다. 반면 반복 작업을 맡던 많은 사람은 먼저 밀려날 수 있다. 사무직도 다르지 않다. 보고서를 정리하고 전달하는 사람보다, 무엇을 물어볼지 정하고 무엇을 결정할지 판단하는 소수만 더 중요해질 가능성이 크다. 연구직 역시 많이 그리는 사람보다, 기계가 내놓은 결과 가운데 무엇이 실제 현장에서 통하는지 가려낼 사람이 더 필요해질 수 있다.
그래서 그날 깐부치킨 테이블 위에서 오간 이야기는 미래차 협력 뉴스로만 끝날 일이 아니었다. 그 장면은 공장 안의 효율화가 결국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흔들 수 있다는 신호에 더 가까웠다.
폭발이 아니라 침수
이 대목에서 많은 사람이 IMF를 떠올린다. 그럴 만하다. 한국 사회가 가장 선명하게 기억하는 일자리 위기이기 때문이다. 외환위기 직후 실업자는 1998년 149만 명, 1999년 137만 4천 명까지 치솟았다. 해고가 한꺼번에 터졌고, 실업이라는 이름으로 바로 보였다. 충격이 눈앞에서 확인되던 시기였다.
하지만 지금의 위기는 결이 조금 다르다. 한 번에 폭발하기보다 더 천천히, 더 넓게 번진다. 겉으로는 조용해 보여도 속에서는 오랜 기간에 걸쳐 차오르는 침수에 가깝다. 실제로 3월 ‘쉬었음’ 인구는 254만 8천 명이었다. ‘쉬었음’은 그냥 노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다. 몸이 아주 아프거나 장애가 있는 것은 아닌데도, 지금은 구직을 멈춘 채 노동시장 밖에 머무는 사람들까지 함께 잡힌다. 겉으로는 실업자로 보이지 않지만, 사실상 일자리 바깥으로 밀려난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 있다.
특히 청년층이 더 눈에 밟힌다. 지난해 20~30대 ‘쉬었음’ 청년이 70만 명을 넘었다는 분석도 나왔다. 이건 청년 개인의 의지 문제로 돌릴 일이 아니다. 일자리가 줄어드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노동시장 밖으로 밀려나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뜻에 가깝다.
실업자 수 자체도 다시 늘고 있다. 2026년 1분기 평균 실업자는 102만 9천 명으로 다시 100만 명을 넘었고, 청년 실업자는 27만 2천 명으로 전체 실업자의 26.4%를 차지했다. 외환위기 때처럼 한 번에 터져 보이지 않을 뿐, 지금의 위기는 더 조용하게 더 넓게 번지고 있다.
이 지점에서 짚어볼 문제가 있다. 과연 우리 사회에 폐업이나 실직을 한 사람들이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완충지대가 남아 있는가.
버티게 하던 경로가 무너진다
한국 사회에서는 오랫동안 자영업, 운수업, 제조업 현장이 그런 역할을 해왔다. 직장을 잃어도 장사를 해보고, 장사가 어려우면 운전이나 물류 일로 버텨보고, 여의치 않으면 건설 현장이나 다른 일용직으로 옮겨가며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예전에는 밀려난 사람을 받아줄 자리가 그래도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그 자리들 자체가 동시에 흔들리고 있다.
그 첫 번째 경로는 자영업이었다. IMF 외환위기 직후 구조조정으로 밀려난 사람들은 생계를 붙들기 위해 대거 자영업으로 향했다. 그래서 자영업은 한동안 실직자가 마지막으로 기대는 완충지대가 됐다. 하지만 급하게 불어난 그 자리는 동시에 과잉 경쟁의 자리이기도 했다. 지금 자영업의 위기가 더 무겁게 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24년 한 해 동안 폐업 신고를 한 사업자가 100만 명을 넘어섰고, 폐업률도 9%를 넘어 2년째 오름세다. 예전 같으면 회사를 나온 사람이 치킨집이나 작은 가게를 열며 버틸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 문마저 예전처럼 넓게 열려 있지 않다.
그다음 문은 운수업이었다. 택시든 화물이든, 비교적 빨리 들어가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자리였다. 예전 같으면 공장에서 밀려난 사람이 운전으로, 배달로, 물류 현장으로 한 번 더 흘러들어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자율주행은 더 이상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어느 도시에서는 이미 기사 없는 택시가 손님을 태우고 다니고, 어느 물류 구간에서는 기사 없는 화물차가 짐을 나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자율주행을 단순히 운전직 몇 개 줄어드는 기술로만 보면 거대한 그림을 놓치는 셈이다. 문제는 운수업마저 예전 같은 완충지대로 남아 있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제는 밀려난 사람을 받아주던 자리만 좁아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밀어내는 쪽의 변화까지 동시에 빨라지고 있다. 한국 제조업을 대표하는 현대차그룹이 공장과 물류를 인공지능과 로봇 중심으로 다시 짜기 시작한 것은 그래서 더 크게 읽힌다. 이 변화가 한 회사의 효율화로 끝날 가능성은 크지 않다. 그룹 안에서 먼저 더 적은 사람으로 돌아가는 공장과 물류 체계를 만들수록, 그 방식은 결국 그룹 밖의 산업과 일자리로도 번져 나갈 가능성이 크다. 공장에서 검증한 기술은 나중에 스스로 달리는 화물차가 되고, 물류 차량이 되고, 배송을 관리하는 시스템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공장 안의 인력 감축은 공장 담장 안에서 끝나지 않는다. 밖으로 나오면 운수업 종사자들이 버티고 있던 자리도 함께 좁아질 수 있다.
그래서 지금 무서운 것은 일자리 하나가 사라지는 속도만이 아니다. 밀려난 사람을 받아주던 다음 자리까지 함께 좁아질 수 있다는 점이다. 내 일이 기계에 밀릴지 모른다는 불안만이 아니다. 한 번 밀려난 뒤 옮겨갈 자리도 예전만큼 남아 있지 않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다. 그래서 이 문제는 산업 뉴스이면서 동시에 생활의 문제다. 공장 안에서 시작된 변화가 결국 평범한 사람들의 생계 경로 자체를 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한국 사회의 시계는 아직 그 변화가 밀려난 사람들의 다음 일자리와 생계 문제로 이어지는 데까지는 가 있지 않은 듯하다. 사람들은 여전히 이런 뉴스를 주가와 집값의 언어로 더 자주 말한다. 현대차가 오를까, 관련주가 뜰까, 어느 지역이 수혜를 볼까. 그런 질문이 틀렸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지금 저 만남이 던지는 더 큰 질문은 그게 아닐 수 있다.
노동시장의 균열은 흩어진 개인 사정처럼 보인다. 누군가는 해고당하고, 누군가는 장사를 접고, 누군가는 구직을 멈춘다. 각각 떨어져 보면 남의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하나하나 흩어져 있던 신호를 모아 놓고 보면, 지금 흔들리는 것은 몇몇 개인의 사정이 아니라 한국 노동시장의 버팀목에 가깝다.
밀려난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가
그래서 깐부 치맥은 미래차 협력 뉴스로만 읽기에는 너무 큰 장면이었다. 저 만남의 의미는 자동차가 더 똑똑해진다는 데 있지 않다. 사람을 덜 쓰는 체제를 더 빠르게 설계하고, 그 체제를 공장과 물류, 그 바깥의 일자리로까지 넓혀갈 수 있다는 데 있다.
과거 산업화의 충격은 적어도 눈에 보였다. 사람의 자리를 대신하는 기계가 공장 안으로 들어오는 장면이 있었고, 분노를 향하게 할 대상이라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사람의 자리를 흔드는 것은 점점 더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인공지능과 시스템, 데이터의 흐름이 되고 있다. 로봇 한 대를 부순다고 멈출 수 있는 변화가 아니다. 그래서 지금의 불안은 더 차갑다. 밀려나는 사람은 늘어날 수 있는데, 정작 무엇과 싸워야 하는지는 점점 더 흐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산시장에서는 기회를 놓칠까 봐 불안해하는 마음을 FOMO라고 부른다. 하지만 지금 한국 사회가 더 먼저 들여다봐야 할 것은 다른 종류의 불안이다. 놓칠 종목에 대한 조급함이 아니라, 내가 하던 일이 점점 덜 필요해지고, 한 번 밀려난 뒤에는 옮겨갈 자리조차 예전만큼 남아 있지 않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지금 더 크게 다가오는 질문은 어느 종목이 오를까 가 아니다. 밀려나는 사람들은 앞으로 어디로 가게 되나, 그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