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다 기차의 추억>>(프란츠 카프카/이준미/하늘연못) 중에서
나는 큰 곤경에 처해 있었다. 급한 여행을 목전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한 중환자가 10마일이나 떨어진 마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강한 눈보라가 그와 나 사이의 넓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 하지만 말이 없었다, 말이. 내 말은 이 얼음장같이 추운 겨울에 무리를 해서 어젯밤에 죽어 버렸던 것이다. (p.245)
카프카의 다른 소설들처럼 이 소설도 급박하고 난처한 상황에서 시작된다. 독자는 주인공 못지 않게 당황스럽다. 특별한 이유나 인과관계의 설명은 없다. 그저 빠져나갈 곳 없고 벼랑에 몰린 듯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방법을 찾고 살 길을 찾으라고 내몬다. 소설의 출발부터 목을 조이는 듯한 초조감이 엄습한다.
환자에게 타고 갈 말은 없고, 끝없이 쌓이는 눈을 보며 망연자실한 그때 돼지우리에서 한 남자가 기어나오고 어디선가 말 두 마리를 데려온다. 그 남자는 말 두 마리에 마차를 묶고, 하녀인 로자를 탐하며 집에 남는다. 화자만 탄 마차는 출발과 동시에 어느새 ‘마치 내 집 안마당의 대문 바로 앞에 내 환자가 있는 집의 마당이 펼쳐진 것같이’ 이미 환자 집에 도착해버린다.
화자가 보기에, 중환자인 젊은이는 건강해보이나, 그는 자신을 그냥 죽게 내버려 두라고 속삭인다. 그러다 별안간 젊은이의 옆구리께에서 손바닥만한 상처가 열려있는 것을 본다.
그 상처는 여러 가지 명암을 지닌 장밋빛으로, 깊은 곳은 어둡고 가장자리로 갈수록 밝아지는데, 표면은 부드럽게 오톨도톨하고, 불규칙하게 피가 모이는 것이 마치 땅 위에 나와 있는 노천 탄광처럼 드러나 있다. (...) 내 새끼손가락만 한 크기의 두께와 길이를 가진 구더기들이, 스스로도 분홍빛인데 거기다 피에 흠뻑 젖은 채, 상처의 안쪽에 꼭 달라붙어서 하얀 작은 머리와 수많은 작은 다리를 드러내고 꿈틀거린다. 불쌍한 젊은이, 자네를 도와줄 방도가 없구나. 내가 너의 커다란 상처를 발견하였으나, 너는 네 옆구리에 있는 이 꽃 때문에 죽는구나.(p.253)
구더기들이 꿈틀거리는 상처를 ‘꽃’이라고 표현했다. 젊은이 역시 자신의 상처를 아름다운 상처라고 표현하며, 그것이 ‘내 모습의 전부’라고 말한다. 여기서 ‘상처’는 무엇일까? ‘상처’가 무엇이기에, 그것이 그의 전부라고 여기는 것일까? 젊은이는 의사에게 자신을 살려줄 거냐고 물은 후, 사실은 의사를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의사 또한 사람들이 의사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한다고 푸념한다. 그러나 곧 의사는 젊은이에게, “자네의 상처는 그리 나쁘지 않네. 도끼로 두 번만 날카로운 각도로 베어 내면 해결된다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관점을 말하는데, 숲에서 나는 도끼 소리도 제대로 듣지 못하는데 하물며 도끼가 그들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알겠는가.” (p.256) 라고 말한다. 여기서 상처는 외과적 상처가 아님을 추측할 수 있다. 즉 의사가 해결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사람들이 믿음을 잃어버려, 목사가 아닌 의사에게 요구한다는 화자의 푸념도 의미심장하다.
누구나 가지고 태어나는 치명적 결함이나 삶의 고통을 상처로 표현한 것일까? 어쩌면 불교적 세계관인 카르마를 대입해볼 수도 있겠다. 치명적 상처 같은 카르마를 가지고 태어났고, 그것은 외과의사가 치료할 수 없는 삶의 고통이다. 그렇다면 ‘도끼’는 무엇일까? 상처가 물리적 상처가 아니듯이 도끼도 물리적 도끼가 아닌 듯하다. 날카로운 각도로 두 번만 베어내면 해결할 수 있는 도끼. 쉽게 끊어낼 수 없는 카르마를 도려내려면, 처절한 각성의 계기가 있거나 죽음 이후의 환생으로나 가능할 일일 테다.
이 소설은 매우 디테일한 상황묘사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초현실적이다. 카프카가 꾼 꿈을 소설로 옮긴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몽환적이고 환상성을 지닌다. 우선 말의 등장부터 그렇다. 말 두 마리가 하늘에서 내려오듯 갑자기 나타났고, 10마일의 거리를 순식간에 당도한다. 이 두 마리의 말은, 의사가 환자를 진료하려고 할 때마다 큰소리로 울어댄다. 그때마다 의사는 계시라도 받은 듯, 환자의 상태를 다르게 진단한다. 이 두 마리의 말은 현실계에 속하지 않는 존재라고 추측할 수 있다.
반면, 시골의사는 현실계에 속해 있다. 그가 신의 영역까지 관여할 수 없음에도 죽음을 앞둔 이들은 의사에게 신의 영역에 속하는 범위까지 요구한다.
어느 날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주어진 삶을 무작정 사는 평범한 사람이 바로 시골 의사가 아닐까?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 상황에 의해, 그저 자신에게 주어졌으니까 의무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당신도 분명 그저 어디에선가 떨어져 나왔지 제 발로 오지 않았죠.”라고 한 젊은이의 말은 시골의사의 수동성을 지적하는 말로 들린다.
벌거벗은 몸으로, 이 가장 불행한 시대의 혹한에 노출된 채, 현세의 마차와 현세의 것이 아닌 말들과 함께, 나 늙은 남자는 정처없이 떠돌아다닌다. 나의 털 코트는 마차의 뒤쪽에 걸려 있지만, 나는 그것을 잡을 수가 없다. 그리고 움직일 수 있는 무뢰한 환자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속았다! 속았어! 잘못 울린 야간 종소리를 한 번 따라갔다가 돌이킬 수 없게 되고 말았다. (p.257)
이 소설은 이렇게 시골 의사의 속았다는 탄식으로 끝이 난다. 무엇에 속았다는 말일까? 무엇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삶에 대한 탄식일까? 이 늙은 의사는 왜 정처없이 떠돌아다닌다는 걸까? 그 젊은이는 죽음으로 이끄는 사자인 것일까? 그래서 위급한 환자라는 야간 종소리에 속아,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건너간 것일까? 어쩌면 환자의 상처 속에 있던 ‘구더기’에 감염되어 환자와 의사 모두 죽음의 세계로 건너갔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카프카는 이 소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시골의사처럼 그저 의무감에 떠밀려 살다가 죽는 덧없는 인생을 말하고 싶었을까?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늘 죽음을 생각하며 살았던 카프카의 현신이 시골의사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