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다 기차의 추억』(프란츠 카프카/이준미/하늘연못) 중에서
「사냥꾼 그라쿠스」는 작품이 가지는 의의와 중요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작품이다. 카프카를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이 작품이 카프카의 대표작이라고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에선 『카프카 전집』 (솔)과 『칼다 기차의 추억』 (하늘연못) 이외의 단편집에선 이 작품을 찾아보기 힘들다. 사전 정보가 없어서인지 작품이 더 어렵게 느껴졌다. 사냥꾼은 왜 죽은 사람이면서 살아있기도 한 사람인지, 그는 왜 ‘죽음의 가장 밑바닥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항해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 신화적이고 초현실적인 분위기의 이야기에서 카프카가 하고픈 말은 무엇이었을까 알 듯 모를 듯한 채로 책장을 무심히 넘겼다.
카프카의 대부분의 작품들처럼, 이 작품의 주인공인 그라쿠스도 카프카의 분신이다. 죽었지만 저승에 속하지 못하고, 이승의 넓은 바다를 항해하고 이쪽과 저쪽을 배회하는 그라쿠스의 모습에 카프카를 대입시키니, 작품 속 은유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온다. 영양을 쫓다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사냥꾼 그라쿠스가 카프카라면, 크라쿠스가 쫓던 영양은 카프카와 약혼과 파혼을 거듭했던 펠리체 바우어라고 볼 수 있다.
“저는 사냥꾼이었는데, 그것이 혹 죄가 됩니까?” (p.203) 라는 대사는 매우 기시감이 있다. 죄책감과 그 죄책감에 대한 반작용으로 자신은 죄가 없다고 항변하는 모습은 카프카의 작품들 곳곳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그의 죄책감은 억압적 양육환경에 의해 내재된 감정이기도 하고, 펠리체 바우어와의 파혼이 남긴 상처로도 보인다. 이러한 죄책감과 섬세한 감성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그는 그렇게 많은 글들 속에서 피 흘리고 강변하고 속죄했나 보다.
카프카의 글들을 읽으면, 성인 남성의 글이 아니라 질풍노도의 청소년이 쓴 글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그의 글들 속에는 여전히 감성과 양심의 날이 서 있고, 자아정체성을 향한 치열한 고통이 담겨있다. 그래서인지, 작품 속에서 발견하는 카프카의 모습에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라고 노래했던 윤동주가 연상된다.
부두에서는 아무도 방금 도착한 사람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두 사람이 여전히 밧줄을 다루고 있는 뱃사람을 기다리느라 들것을 내려놓았을 때조차도 아무도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고, 아무도 그들에게 질문하지 않았으며, 아무도 그들을 유심히 쳐다보지 않았다. (p.197)
이 부분에서는 그의 외로움과 철저한 소외가 느껴진다. 타인들과의 소통의 단절에서 오는 고독이 아프게 다가온다. 또한 죽었으나 살아있다고도 할 수 있고, 죽음의 바람 따라 이승의 바다를 항해하는 그라쿠스의 모습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카프카 자신의 모습이다. 프라하에서 독일어를 쓰는 유대인으로 살았던 카프카는 늘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주변인과 경계인으로서의 정체성에 고뇌했다. 이런 그의 태생적, 환경적 정체성은 그의 작품들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학술원에의 보고」에서 인간의 흉내를 내던 원숭이가 그렇고, 「사냥꾼 그라쿠스」의 그라쿠스가 그렇다. 그러므로 이 작품이 카프카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주요 작품임에 틀림없다.
끝없이 이어진 이 옥외계단 위에서 저는 배회하지요. 금방 위에 있다가, 금방 아래로, 금방 오른쪽에 있다가, 금방 왼쪽으로, 그렇게 항상 움직이고 있지요. 사냥꾼이 나비가 된 셈이지요. (p.202)
이 진술에서처럼 카프카는 사냥꾼보다는 ‘나비’에 더 가깝다. 섬세하게 떨리는 나침반 바늘처럼, 바람의 방향을 감지하며 가늘게 떨리는 나비의 날개처럼, 그의 양심과 정신은 항상 ‘하늘 쪽으로 뻗은 계단’을 향하고 있었다고 믿는다. 키도 없이, 지상의 해양을 적막하게 떠돌던 그의 영혼이 이제는 하늘 위 빛나는 그곳에 다다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