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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주 Jan 05. 2021

아기들의 뇌 속엔 누가 살고 있나 - 「공생가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김초엽/허블) 수록 소설 (3)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수록된 세 번째 소설은 「공생가설」이다. 김초엽 작가의 반짝이는 상상력과 그것을 이야기로 풀어놓는 솜씨가 놀랍다. 이 소설은 제목 그대로 인간과 다른 생명체가 공생한다는 이야기다. 즉 우주의 지적 행명체가 아기의 뇌 속에서 공생하면서 아기들을 ‘인간답게’ 길러내는 역할을 한다. 그들은 인간을 숙주로 삼아 생명을 이어가는 대신, 인간에게 윤리, 철학, 이타성 들을 가르친다.      


 ‘뇌의 해석 연구소’는 아기들의 뇌를 판독하여 언어표현으로 옮기는 연구소다. 연구원들은 아기들의 뇌에서 일어나는 철학적인 생각들을 읽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아기들의 뇌 속에서는 여러 인격체가 대화를 나누고 있고, 그 지적 생명체는 아기의 뇌 속에서 살다가 아기가 7살이 되면 기억을 가지고 사라진다. ‘그들’은 또 다른 아기에게로 옮겨가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면 그 지적 생명체는 어디서 온 것일까?      

 

 ‘류드밀라’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외계 행성을 기억하여 그림으로 그리고, 행성에 관한 구체적 정보를 알고 있었다. 류드밀라가 죽은 후 외계 행성 관측소에서는 그녀가 그렸던 행성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행성을 발견한다. 류드밀라의 상상 속 행성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행성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뇌해석 연구원들은 아기들 뇌 속의 ‘그들’이 아주 오래 전 류드밀라의 행성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류드밀라가 어른이 되어서까지 행성을 기억하고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류드밀라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생물학적 욕구에만 지배되지 않고 이타성, 윤리, 철학 등 고차원적 사고체계 때문이다. 그런 인간 고유의 가치를 인간 속에 심어주는 존재가 다름 아닌 외계에서 온 지적 생명체라는 발상이 재미있다. 그래서 그들은 기생이 아니라, 공생인 것이다. 숙주인 인간의 뇌 속에서 생명을 이어가는 대신, 인간에게 더 높은 가치를 심어주는 거다.      


  ‘그들’은 아기가 7살이 되면, 그동안의 기억들을 거두어 사라진다. ‘그들’이 심어준 ’인간성‘은 7살 이전에 형성되는 것이고, 그것은 그들이 거두어 가는 기억 속에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인성과 철학적 사고는 ’기억‘이 아니라, 7세 이전에 학습되고 체득한 일종의 ’형질‘이기 때문이다. 그들에 의해, ’학습‘된 것이지만, 표피적 ’기억‘이 아니라, 유전적 형질 속에 ’기록‘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7세 이후에 사라지는 이유는 뭘까? 7세 이후의 인간의 뇌는 ’그들‘이 살기에 적합한 환경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뇌의 환경이 재조성되고 이성과 논리를 학습하는 단계로 나아가기 때문에 ’뇌 속의 보육자‘가 컨트롤할 수 있는 시기가 지났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 이는 다른 의미로 인성과 성격은 7세 이전에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소시오패스나 사이코패스 같은 경우는 아기 시절에 뇌 속에 사는 ’그들‘이 없었거나, ’그들‘이 제 역할을 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류드밀라의 뇌 속에 사는 ’그들‘이 류드밀라가 죽을 때까지 떠나지 않고 함께 했던 것처럼 반대의 오류나 예외는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다.      

 

 아기의 뇌 속에 살면서 인간을 ’피와 눈물‘을 가진 존재로 키워나간다는 외계 생명체는 전통적 의미의 ’신‘ 또는 ’신의 가호‘로 대체해도 되지 않을까.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에서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그곳의 창시자를 찾아 떠난다거나, 시초지를 순례한다는 발상에서도 ’신‘의 뜻을 찾아 떠나는 순례자를 연상할 수 있었다. 전통적으로 신비롭고 영적인 체험은 신과 종교의 영역이었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신의 영역을 과학이 대체하고 있다. 종교와 신의 영역은 증명이 불가능하지만, 과학의 영역은 아무리 신비스러운 현상일지라도 증명이 가능하다. 아기들의 뇌 속에서 대화를 하고 있는 ’그들‘의 존재를 알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뇌판독 분석지와 구체적 신호로 알 수 있다. 그렇기에 과학은 신비로우면서도 분명하다.      

 

 과학으로 불가능한 영역은 점점 줄어들지도 모른다. 그런 점 때문에 과학의 맹신은 또다른 종교가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만약 소설에서 말하는 것처럼 아기의 뇌 속에 사는 지적 생명체가 실제로 있고, 그것이 과학적으로 증명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그 존재를 인간의 뇌에서 끄집어내어 위험한 실험을 할 수도 있고, 그들이 사는 행성으로 탐사와 이주를 시작할지 모른다. 나의 상상은 자꾸만 과학의 발전으로 재앙이 시작되는 쪽으로 흘러간다. 과학의 발달이 디스토피아를 가져올 것만 같은 상상도 학습된 것일까. 아마도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고, 인간 이외의 모든 지구생명체들의 고난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뇌 속에서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바이러스나 기생충이 아니라, 인간을 인간답게 키워주는 고마운 보육자가 살고 있다는 발상이 재치있다. 좀 무서우면서도 동화적인 느낌의 소설이다. 이 소설 속 아기들의 뇌 속엔 애니메이션 <보스베이비> 속 아기처럼 양복 입고 목소리 걸걸한 어른이 살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그 또한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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