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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주 Oct 16. 2020

폭력적인 세상에서 꺾이고 스러지는 인간_카프카『실종자』

(프란츠 카프카/편영수/지식을 만드는 지식)

**이 글에는 소설의 주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프란츠 카프카는 세 편의 장편소설을 남겼다. 그가 남긴 장편소설, 『실종자』, 『소송』, 『성』을 일컬어 고독 3부작이라고도 하는데, 모두 그의 사후에 친구인 막스 브로트에 의해 출간되었다. 이 중, 『실종자』는 카프카의 첫 장편소설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미처 제목을 붙이지 못한 미완성작이었기에, 판본에 따라 <<아메리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그러나 카프카가 <펠리체에게 보낸 편지>에서 ‘실종자’라는 제목으로 이 작품을 언급했으므로, 『실종자』가 가장 근거 있는 제목으로 인정된다.     


이 작품은 그의 초기작이어서인지, 다른 작품들과 다른 점이 몇 가지 눈에 띈다. 우선 이 작품의 무대가 유럽이 아닌, 미국 뉴욕이며, 옥시덴탈 호텔, 오클라하마 극장처럼 공간적 배경이 구체적 명칭을 가진다. 또한 사건의 전개 양상이 몽환적이기보단 다이내믹하고 흥미진진하다. 그러나 이 작품에도 카프카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공통되는 정서와 이야기의 전개 양상이 있다. 우선 주인공은 아버지 같은 존재인 권위자들에 의해 시련을 겪는다. 어디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주인공의 실존은 늘 위태롭다. 주인공에게 가해지는 배척과 처벌, 추방은 명백히 부당하지만, 죄가 있다고 낙인찍히는 이상 구원받지 못한다.     


열일곱 살의 카를 로스만은 서른다섯의 하녀 요하나 브루머를 임신시켰다는 이유로, 그의 부모가 그를 미국으로 추방했다. 뉴욕항에 도착한 카를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자유의 여신상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횃불을 든 모습이 아니라, 칼을 높이 쳐들고 있는 모습이다. 카프카는 이 첫 장면에서 앞으로 전개될 카를의 운명을 암시하고 있다. 자유의 나라 미국이 이방인 카를에게 가혹한 공간이며, 심판의 공간임을 드러내고 있는 장면이다.     


배에서 내리려던 카를은 우산을 놓고 왔음을 깨닫고 누군가에게 트렁크를 맡겨놓고 선실로 내려간다. 그곳에서 상관의 부당함에 분개하는 화부를 만나고, 그를 도와주다가 상원의원인 외삼촌을 만난다. 화부를 변호하는 카를에게 외삼촌은, “사태를 오해하지 마라. 정의의 문제가 중요할지 모르지만, 동시에 규율의 문제도 중요하다. 이 두 가지가, 특히 규율이 여기서는 선장님의 재량에 속하는 문제거든.” (p.49) 이라고 말한다. 이 소설 전체에서 정의는 실종되고, 규율만이 살아 날뛴다. 선장, 외삼촌, 웨이터장, 수위장 등 자본주의 계급 체계하에서 권력자들이 휘두르는 합법적 폭력이 규율이다. 정의의 편에 섰던 카를이, 규율과 권위에 의해 어떻게 무너져가는지의 과정을 소설 전체에서 보여준다. 가진 자들은 기존 질서를 지켜나가기 위해 정의를 철저히 외면하고 규율을 공고히 해나간다.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도 흔히 만날 수 있는 상황이다.     


외삼촌에 이끌려 배를 떠나려는 카를은 남겨질 화부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신을 스스로 지켜야만 해요.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말해야만 해요.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진실을 전혀 몰라요. 내 말대로 하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서 더 이상 내가 직접 도와드릴 수 없을 것만 같으니까요.” (p.51)     


이 소설에서 미국은 자본주의 사회의 어두운 면이 전면에 등장하는 공간이다. 계급 갈등, 과도한 분업화로 인한 인간의 부품화, 극단적인 빈부의 격차 등이 소설 전반을 지배한다. 하급 노동자인 화부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카를은 화부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면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말해야 한다고 했다. 이는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행위들은 정당하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말과 같다. 현대적인 노동자의 권리의식이 이 소설 곳곳에 등장한다. 이는 카프카가 14년 동안 ‘노동자재해보험공사’의 관리로 재직했던 경험이 반영된 듯 보인다. 그곳에서 그는 노동자들의 부당한 대우와 비참한 삶들을 보아왔을 것이다. 노동자 문제와 관료주의에 대한 비판의식이 카프카 작품 곳곳에서 느껴진다.    

 

카를이 화부에게 당부하는 이 말들이 어쩐지, 향후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정작 이후 펼쳐지는 이야기에서 카를은 자신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일들에 ‘아니오’를 분명히 말하지 못한다. 들라마르쉬와 로빈슨의 악행에도 소극적으로 방어할 뿐이고, 플룬더 씨의 집에서 나올 때와 호텔에서 쫓겨날 때도 자신을 적극적으로 변호하지 못한다. 선의를 갖지 않은 사람들에게 소극적인 자기 방어가 통할 리 만무하다.     

 


소설 초반에 카를은 외삼촌의 지원 아래 미국 정착이 순조로워보인다. 그러나 외삼촌의 뜻을 어기고 플룬더 씨의 별장 초대에 응했다는 이유로 쫓겨난 이후 카를의 생은 끝없는 몰락을 거듭한다. 여관에서 만난 빈털터리 기계공들인 들라마르쉬와 로빈슨에게 이용만 당하다 헤어지고, 옥시덴탈 호텔에서 엘리베이터 보이일을 한다. 그러나 만취해 찾아온 로빈슨으로 인해 억울한 해고를 당하고 들라마르쉬와 로빈슨이 얹혀사는 브루넬라의 하인이 된다. 이후, 이야기는 각 장별로 도입부만 기록되고 미완성으로 남는다. 그가 마지막으로 몸을 실은 곳은 오클라하마 극장으로 가는 기차 안이다.     


카를이 길모퉁이에서 발견한 오클라하마 구인 벽보는 여러 모로 수상쩍다.     


오늘 클레이튼 경마장에서 아침 6시부터 자정까지 오클라하마 극장의 직원을 채용합니다! 오클라하마의 대형 극장이 여러분을 부릅니다! 단지 오늘 한 번의 기회뿐입니다!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놓치게 됩니다!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은 우리와 함께 일합시다! 누구나 환영입니다! 예술가가 되고 싶은 사람은 지원하십시오! 우리 극장은 모든 사람에게 일자리를 줄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일하겠다고 결심한 사람에게는 지금 이 자리에서 축하를 보냅니다! 그렇지만 자정 전에 도착하도록 서두르세요! 모든 문이 12시에 잠기고 다시는 열리지 않습니다! 우리를 믿지 않는 사람은 저주받을 겁니다! 어서 클레이튼으로 오세요! (p.416)       


구인 벽보에 적힌 모든 문장 뒤엔 느낌표가 붙었다. 다분히 선동적이고 과장돼 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놓치게 되고, 모든 사람에게 일자리를 줄 수 있고, 심지어 이들을 믿지 않는 사람은 저주받을 거라고 한다. 구인 광고라기보단 한 번 발을 들이면 ‘영원히’ 되돌아올 수 없는 인신매매나 광신도의 함정 같다.  


모든 문이 12 시에 잠기고 다시는 열리지 않는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12 시라는 시각은 소설 초반에, 그린 씨가 외삼촌의 편지를 카를에게 전해준 시각이다. 12시까지 카를을 잡아두었다가 편지를 전해주는 그린 씨의 행동에서, 12시 이전까지는 카를에게 희망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린 씨를 비롯하여 플룬더 씨의 별장에서 만난 모든 인물들이 카를의 추방에 동참했다고 볼 수 있다. 실수나 선택을 되돌릴 수 있는 마지막 시한이며,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는 기준점을 12시로 설정했다고 여겨진다.    

 

한 번 가면 돌아올 수 없는 강이란 무엇일까. 인생의 어떤 선택들은 되돌릴 수 없기도 하지만, ‘영원히’ 잠기고 다시는 열리지 않는 기회란 없다. ‘영원’과 ‘믿음’과 ‘저주’가 필요한 영역은 종교와 내세가 아닐까. 채용 심사를 보는 경마장에서 천사 복장을 한 사람들과 그들이 끊임없이 불어대는 나팔 소리, 신분증을 확인하고 전직에 따라 분류하는 장면들을 보면, 어쩌면 카를이 이미 죽은 후 다른 세상으로 가는 모습이 아닐까 상상해보게 된다.     

 상상의 나래를 멈추고 서사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카를은 ‘아직’ 살아있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과 이틀 밤낮을 기차를 타고 달린다. 기차 안의 그들은 ‘어둡고, 좁고, 톱날 같은 계곡’들을 지나고, 큰 파도가 되어 떨어지는 계곡물의 찬 기운 때문에 얼굴이 덜덜 떨리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카를이 탄 기차는 어디로 향해 가는 것일까? 그들이 당도할 오클라하마 극장이란 ‘누구나 환영’받고, ‘누구나 예술가’가 되는 곳은 아닐 것이다. 카를이 기차 창으로 보았던 ‘뾰족한 쐐기 모양의 암석덩어리들’, ‘톱날 같은 계곡들’은 이들에게 다가오는 운명을 암시하는 듯하다. 모든 사람들을 기차에 태워 어딘가로 가는 모습은 흡사, 홀로코스트가 연상된다. 영문도 모르고 기차에 탔던 유대인들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었던 것처럼 카를과 이들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고 있는 것만 같다.     


설사, 카를이 오클라하마 극장에 무사히 당도한다고 해도 그의 존재는 ‘실종’ 상태가 된다. 카를은 채용 면접 당시, 본명 대신 ‘니그로’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감춘다. 미국에 도착해 카를은 자신의 물건들을 차례로 잃는다. 우산, 모자, 사진, 트렁크를 차례로 잃은 카를은 마지막엔 이름마저 잃는다. 이는, 그가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들을 하나씩 잃어간다는 의미이고, 결국엔 자신의 모든 것을 잃는다는 의미다. 존재의 의미를 잃고 실존을 증명할 수 없는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어보인다. 실존을 잃은 자는 ‘실종자’가 된다.     


이 소설은 열일곱 살 소년이 낯선 나라에서 시련을 겪어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세상의 부조리와 혐오스러운 현실을 온 몸으로 겪어나간다는 측면에서 성장소설로도 볼 수 있다. 시련의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내적 자아의 성장이 아닐 뿐이다. 권위와 폭력과 구역질 나는 현실을 뚫고 이겨낼 만큼 강하지 않은, 평범한 인간이 카를이다. 사실, 우리 모두 카를과 다르지 않다. 그가 겪은 일들을 겪고도 ‘실종’당하지 않고 ‘성장’을 이뤄낼 강인한 인간이 몇이나 될까. 카프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일을 이겨내라 말하지 않는다. 폭력적인 세상에서 꺾이고 스러지는 인간을 보여줄 뿐이다.     


그의 소설을 읽고 나면 항상 진한 연민의 늪에서 헤어나오기 힘들다. 어디서 날아오는지도 인식하지 못하다가 어딘가에서 날아온 돌이 가슴에 박혀버린 느낌이 든다. 그래서 감히 표현하자면, 카프카의 글을 읽는다는 건, 가슴으로 날아오는 돌의 무게와 통증을 받아내는 과정이다.    



*읽은 때 : 2020.09.29~2020.10.11

*기록한 때 : 2020.10.12.

*별점 : 4.0/5.0

*한줄평 : 카프카의 고독 3부작 중 가장 다이내믹하게 펼쳐지는 사건들에, 지루할 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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