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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주 Oct 16. 2020

내적 고통의 외적 형상화_카프카<변신>

 <<변신, 단식광대>> (프란츠 카프카/김형국/인터북스) 중 <변신>


<변신>은 카프카의 작품들 중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이며, 비교적 덜 난해한 작품으로 일컬어진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갑자기 벌레로 변한 주인공의 이야기는 지금 기준으로도 파격적이고 독특하다. 100여년 전, 이 파격적인 소설이 어떻게 책으로 나오게 되었을까? 카프카가 <변신> 원고를 들고 출판사를 찾았을 때는 1912년이었으나, 책이 되어 나온 때는 1915년이다. 당시 편집자는 이 소설이 대중적이지 않다고 판단해 출판을 미루었으나, 친구인 막스 브로트와 또다른 친구들이 출판사에 찾아가 수차례 독촉을 한 끝에 3년만에 책이 되어 나왔다고 한다.      


 당시 카프카가 쿠르트 볼프 출판사에 <변신> 출판을 의뢰하면서, 절대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한 것이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이 작품에 절대 벌레를 그려넣지 말아달라.’였다고 한다. “벌레 자체는 묘사될 수 없습니다. 희미하게라도 묘사할 수 없습니다.” 카프카의 이 단호한 부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변신> 속 벌레가 ‘벌레’ 자체로 보여서는 안 된다는 작가의 의지가 느껴진다. 또한 그레고르 잠자에 대한 혐오감 어린 시선을 경계하고 주인공을 벌레라는 외양에 가두고 싶지 않았던 것으로 읽힌다. 삽화에 벌레를 그려넣는 순간, 그레고르 잠자는 그저 한 마리의 흉측한 벌레일 뿐이며, 벌레로 변한 괴상한 남자의 기괴한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작가의 이러한 의도를 존중하여 그 이후로도 출판사들은 <변신>에 벌레를 그려넣지 않았다. 대신, 카프카가 제안한 대로 그레고르 잠자의 방 앞에서 충격받은 가족들 모습이라든가, 계단 아래로 도망치는 회사 지배인의 뒷모습 등이 그려졌다. 이와는 달리, 한국의 출판사들은 삽화로 벌레를 그려넣곤 했다. 이는, 작가의 의도를 훼손한 명백한 폭력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자, 최근엔 벌레 그림이 사라지는 추세다. (청소년 대상 <변신>에는 여전히 벌레그림이 가득하다.)     

 


출장 중개인 (영업 사원)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날 아침 눈을 떠보니 커다란 벌레로 변해있었다. 5시 기차를 타고 출장 여행을 떠나야 함에도 7시가 다 된 시간까지 기척이 없다. 그레고르의 방문 앞에서 가족들이 애타게 방문을 두드리고 회사 지배인마저 나타나 해고를 하겠다며 위협한다. 그동안 그레고르가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 왔지만 벌레로 변한 그를 가족들은 그의 방에 가두고, 급기야 아버지가 던진 사과를 등에 맞고 서서히 죽어간다.    


 아, 얼마나 힘든 직업을 택했는가! 매일 출장여행을 해야 하니 말이다. 영업에서 오는 긴장은 사무실 일에서의 그것보다 훨씬 격심하다. (...) 기차 연결에 대한 걱정, 불규칙적이고 부실한 식사, 그리고 늘 바뀌며, 결코 지속적이지도 못하고 진심에서 이뤄지는 것도 아닌 인간 교류가 그것이다. 이 모든 게 너무 지긋지긋하다! (p.11)      


 가족들을 부양한다는 사실에 그레고르는 자부심과 기쁨을 느꼈지만, ‘이 모든 게 너무 지긋지긋하다.’는 게 그의 또다른 진심이었다. 그레고르가 출장중개인으로 직책을 옮긴 다음, 출장을 다녀올 때마다 현금화된 수입을 탁자에 올려놓으면 가족들 모두 기쁨과 고마움에 들떴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주는 쪽도 받는 쪽도 시들해졌다. 가족 안에서의 착취와 희생이 습관화되고 당연시되면 어느 순간 남는 것은 지긋지긋함과 몰염치다. 


 침대 머리맡에 있는 문을 조심스럽게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레고르!」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그것은 어머니였다. (...) 아버지는 옆문을 노크했다, 약하게, 하지만 주먹으로. (...) 얼마 후 그는 다시 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레고르! 그레고르!」 하며 경고했다. 다른 쪽 옆문에서는 누이가 작은 목소리로 「그레고르 오빠? 몸이 안 좋아? 필요한 거라도 있어?」라고 걱정스럽게 말했다.(p.14~p.15)


 그레고르의 방은 세 군데에 문이 있고, 그 문들은 가족들을 향해 열릴 수도 닫힐 수도 있다. 여기서 문들은 굳게 닫힌 문이며, 그레고르는 그 문들을 모두 잠그고 잔다. 그 문들은 소통의 문이라기보다 감시의 문이라고 느껴진다. 어머니는 침대 머리맡 문에서, 아버지는 옆문에서, 누이는 다른쪽 문에서 노크를 하며 그레고르의 출근을 재촉한다. 이는 그레고르가 이 집에서 어떤 존재인지 단적으로 드러내는 장치처럼 보인다. 가족들은 그레고르를 사방에서 둘러싸고 있고, 그 안에 갇힌 그레고르는 가족들의 요구와 욕망을 위해 방문을 열고 충실히 출근해야 하는 한 마리 일벌레였다. 그레고르의 방은 아늑하고 사생활이 보장된 방이 아니었다. 그는 그 방에서 최소한의 휴식만을 취한 뒤 다시 사방으로 열리는 문들 중 하나를 열고 다시 기차에 몸을 실어야 했다. 그레고르가 자신의 집에서도 방문을 잠그고 자는 건, 그레고르의 무의식의 반영으로 보인다. 잦은 출장으로 인한 몸에 밴 습관이라고 하지만, 그에겐 집도 타지의 숙소와 다를 바 없다. 출장지에서든 자신의 집에서든 그가 있는 방은 잠시 몸을 뉘인 후 곧 떠나야 하고 비워줘야 하는 방이다.      

 

인간의 형상이지만 실상은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일벌레의 삶을 살았던 그레고르는 진짜 벌레의 형상으로 바뀐다. 벌레의 형상으로 바뀐 후 그레고르는 비로소 벌레가 아닌 한 개인으로 돌아간 게 아닐까. 가족들이 그레고르를 어떻게 여기는지 알게 되었고, 자기만의 공간에서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그레고르는 대답하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놀랐다. 분명히 자신의 이전의 목소리였으나, 밑에서부터 나오는 것 같은, 억누를 수 없고 고통스러운 픽픽 하는 소리가 섞여 있었다.” 라는 문장에서 그레고르의 변화가 분명히 드러난다. 그는 그 동안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억누를 수 없는 고통이 가슴 속에서 차올라도 고통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벌레가 된 이후에 비로소 고통스러운 픽픽 소리가 나왔다는 건 내면의 목소리를 비로소 내게 되었다고 느껴진다. 그레고르가 내는 벌레의 소리는 그레고르의 내면에 억눌렀던 고통의 비명으로 들린다. 그가 가족들의 감시와 종용의 상징인 사방으로 뚫린 문 안의 쪽잠이 아니고 자신만의 삶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그는 벌레로 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레고르의 변화에, 가족들은 그가 왜 그렇게 변했는지, 그의 내적 아픔에 대해 관심 갖지 않았다. 가족임에도 그들은 그레고르의 외적 변화만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가 더 이상 돈을 벌 수 없다는 사실만 중요했다. 특히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해 고된 일을 해왔던 아들에 대한 잠자 씨의 태도는 분노가 일 만큼 이해되지 않는다. 아들을 위한 어떤 적극적인 행동도 취하지 않았지만 마음으론 아들을 안타깝게 여긴 어머니와, 먹을 것을 챙기며 한동안 오빠를 보살피던 동생 그레테와 달리, 잠자 씨는 처음부터 벌레가 된 그레고르에게 적대적이었다. 지팡이를 휘두르고 사과를 던지는 등 그의 행동은 아버지로서의 사랑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들에 대한 잠자 씨의 부당한 태도는 카프카와 갈등을 빚었던 아버지의 투사로 보인다.     


누이는 가족 중 유일하게 음식을 갖다주고 청소를 해주는 등 그레고르를 돌봐주지만 그녀 또한 벌레의 외양을 한 오빠에게 혐오감을 느꼈음을 알 수 있다. 그녀가 음식들을 걸레나 빗자루로 밀어넣고 쓸어가는 행동이나, 그레고르의 방에 들어왔을 때 코를 감싸쥐고 숨을 참는 모습 등을 통해 그녀 또한 그레고르를 사랑하는 오빠로 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마저도 나중에는 무관심해져 그레고르의 방에는 먼지가 굴러다니고 집안의 온갖 물건들을 밀어넣어 창고로 만들어버린다.      

 

벌레의 외양으로 변했지만, 그레고르는 여전히 벌레가 아니라 인격체였다. 그레고르가 자신이 만든 액자를 지키기 위해 액자에 달라붙었던 것, 동생의 바이올린 연주에 이끌려 문밖으로 나오는 행동들은 그의 정체성이 벌레가 아니라 사람임을 나타내는 행동이었다.     


 가족들은 그의 내면이나 정체성 등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더 이상 집안에서 쓸모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그레고르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할 뿐이다. 동생 그레테가 그레고르를 ‘저것’이라고 지칭하고, 그레고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가족들의 모습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심지어 그레고르의 죽음에 안도하며 소풍을 떠나는 가족들의 모습은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엔딩이다.      


 가족간에도 엄연히 존재하는 소외, 착취, 불평등 문제가 존재한다. 자본주의 하에서 기계부품 같은 인간의 소외를 가족 안의 문제로 다루었다고 해석하는 비평가들도 있다. 카프카는 자신의 작품을 한 가지로 규정하고 해석 당하기를 거부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을 한두 가지로 정의내리는 것도 또 하나의 폭력일 수 있다.  ‘변신’이 내적 고통에 따른 외적 표상인지, 착취를 거부하기 위해 택한 탈출구인지 그저 각자가 읽고 느껴지는 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20대에 읽은 <변신>에선 현실에서 탈출하고 싶은 내가 보였고, 중년에 읽은 <변신>에선 가족 안에서 일방적 희생을 강요당하는 모든 ‘가장’들이 보인다. 가족 위에 군림하는 권위적인 가장이 아니라, 혼자만의 어깨에 과도한 짐을 짊어지고 부양의무에 허덕이는 가장, 가부장제 하에서 희생하는 어머니, 경제력을 잃은 부모를 부양하기 위해 병들어가는 소년소녀 가장, 가정폭력에 병들어가는 가정 내의 약자들. 이들 모두가 그레고르일 수 있다.     

 

죽어가는 순간까지 음악에 감동하고, 가족들에 대한 사랑을 품고 스스로 죽음을 택한 그레고르의 모습을 통해, 인간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벌레가 된 그레고르를 대하는 가족들의 모습은 그레고르와 대비된다. 벌레의 형상을 한 그레고르와 인간의 형상을 한 가족들 중 누가 더 인간적일까. 



*읽은 때 : 2020.09.15

*기록한 때 : 2020.09.27

*별점 : 4.5/5.0

*한줄평 : 강렬한 이야기, 완벽한 구성, 메타포의 비장미. 재독, 삼독에서 더 많은 것들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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