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주 Oct 16. 2020

봄이 오려면 얼마나 더 있어야할까_ 카프카『성』

(프란츠 카프카/권혁준/창비)

*이 글에는 결말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카프카는 생전에 『소송』, 『실종자』, 『성』 이렇게 세 편의 장편 소설을 남겼는데, 이들 세 작품은 고독 3부작이라고도 불린다. 이 중 『성』은 1922년 카프카가 요양원에 있을 때 쓴 소설로, 그가 쓴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 작품 역시 불태워달라는 카프카의 유언을 따르지 않은 막스 브로트에 의해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글쓰기와 문학은 카프카가 살아가는 힘이자 존재 이유였다. 그는 왜 그의 전부나 다름없었던 작품들을 불태워달라고 했을까? 미완성인 채로 세상에 남겨두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까? 자신을 고스란히 투영시킨 분신들을 세상에 남겨두기 싫었던 건 아닐까? 병상에 누워 짧은 생을 돌아보며 집필했을 카프카, 고독과 암담함 속에서 종말을 기다렸을 카프카가 보이는 듯해 마음이 아프다.      


 이 소설은 해독이 용이하지 않다. ‘『성』은 미완성임에도 카프카의 집필 의도와 구상이 훼손되지 않은 작품으로 평가되며, 그의 대표작이자 가장 난해한 작품 중 하나로 언급된다.’(역자 해설 p.447) “모든 문장이 나를 해석해보라고 하지만 어떤 문장도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라는 아도르노의 평가는 손뼉을 치고 싶을 만큼 공감되는 말이다. 카프카의 작품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종교적, 실존주의적, 시대적, 전기적 배경 등 관점에 따라 여러 의미로 해독될 수 있다고 한다. 전문가들의 의견도 다양하게 엇갈리는 이 작품을, 텍스트의 맥락을 따라가며 읽어나가기 쉽지 않았다. 이 인물들은 왜 이런 행동을 할까? 이런 설정은 어떤 의미일까? 수많은 물음표가 쏟아지는 책이었다. 소설이 끝나기 전에 물음표들이 해결되리라 기대하면 안된다. 다 읽고 나서도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 게 카프카의 작품 읽기이다. 현실과 초현실이 뒤섞인 듯한 소설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가 문득 카프카의 목소리를 듣는다. “내 의도를 파헤치려 하지마, 그냥 느껴지는 대로 느껴. K는 나만의 K가 아니고, 성은 나만의 성이 아니야. 너의 K, 너의 성을 떠올리며 읽으면 돼.” 라고, 카프카가 말하는 듯하다.       

   


 K가 도착한 때는 늦은 저녁이었다. 마을은 눈 속에 깊이 잠겨 있었다. 성이 있는 산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안개와 어둠이 산을 둘러싸고 있었고, 그곳에 큰 성이 있음을 암시하는 아주 희미한 불빛조차 눈에 띄지 않았다. K는 국도에서 마을로 이어진 나무다리 위에 서서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허공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p.7)     


 이제 K는 저기 위쪽으로 맑은 대기 속에서 또렷한 윤곽을 그리며 서 있는 성을 쳐다보았다. 모든 물체의 형상을 그대로 드러내주면서 얇은 층을 이루며 두루 쌓인 눈 때문에 성의 윤곽은 한층 더 또렷하게 나타났다. 실제로 성이 있는 산 쪽에는 이곳 마을보다는 눈이 훨씬 적게 내린 듯했는데, 이곳은 어제 국도를 따라 걸어올 때만큼이나 앞으로 나아가기가 힘들었다. 이곳 마을에는 눈이 오두막집 창문까지 쌓여 나지막한 지붕을 내리누르고 있었으나, 저기 산 위에는 모든 것이 자유롭고 경쾌하게 위로 솟은 모습이었다. (p.16)     


 이 소설 역시 카프카의 다른 소설들처럼 주인공이 막막한 상황에 뚝 떨어진 채 이야기가 시작된다. 토지 측량사 K는 눈이 하염없이 내리는 늦은 저녁, 성이 희미하게 보이는 성 앞 마을에 도착한다. 성의 주인으로 짐작되는 베스트베스트 백작님의 초청으로 이곳에 왔지만 성에 들어갈 수가 없다. 이 마을 어디에서도 K를 환대하지 않아 머물 곳조차 막막하다.      


 이 소설에서 성은 실재하는 공간일까? K의 눈에 비친 성의 모습을 보면, 성은 실재하지 않는 허상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어쩌면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리 보이는, 각자가 추앙하는 절대 권위나 이상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마을 사람들은 성의 권위에 절대복종하는 모습이다. 마을 사람들이 절대 복종하는 대상은 성이 아니라, 성의 관리들이라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권위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절대복종하지 않는 이는 혐오의 대상이 된다. 아말리아 가족이 그렇고, 외지인인 K가 그렇다.      


 성의 절대 권위를 상징하는 인물은 고위 관리 클람으로 설정되어 있다. 클람은 소설이 끝날 때까지 직접 등장하지는 않는다. 마을 사람들의 숱한 대사 속에, K가 전해 받는 편지 속에, 헤렌호프 여관에서 프리다가 보여준 엿보기 구멍 저 너머에 등장할 뿐이다. 클람은 어떤 인물일까? 실재하는 인물일까?   

   

 "이곳에는 클람이 지나칠 정도로 많아, 클람이 너무 많다고. 클람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이곳을 떠나려는 거야. 내게 필요한 사람은 클람이 아니라 당신이라고.” (p.193)     


 “눈으로 본 것, 소문으로 들은 것 그리고 왜곡을 가하는 몇 가지 부수적인 의도가 겹쳐져서 클람의 이미지가 만들어졌는데, 그 윤곽은 대략 맞을 거예요. 그러나 윤곽만 맞는 거죠. 그밖의 클람의 이미지란 가변적인데, 물론 그것도 클람의 실제 생김새만큼은 아니지만요. 그는 마을에 올 때와 떠날 때의 모습이 다르며, 맥주를 마시기 전과 마시고 난 후의 모습이 다르고, 깨어 있을 때와 잘 때의 모습이 다르며, 혼자 있을 때와 대화할 때의 모습이 다르다고 해요. 그렇게 보면 저 위 성에 있을 때의 모습이 거의 완전히 다르다는 점도 이해가 되죠. 그리고 마을 안에서 떠도는 이야기들 사이에도 상당히 큰 차이가 있어요. (...)” (p.249)     


 클람이 지나치게 많다는 프리다의 말로 미루어, 클람은 특정인물이라기보다는 그녀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권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올가가 묘사하는 클람의 가변적인 모습에서도 클람이 실재하는 인물임을 의심하게 된다. 클람(klamm)이라는 이름은 ‘망상’이라는 뜻의 체코어 ‘klam’에서 온 것이라 한다. 이름에서 클람이라는 극중 인물이 허구이거나 망상을 상징한다는 추론이 설득력을 얻는다.     


 K의 직업이 토지 측량사인 이유는 무엇일까? 토지 측량사가 굳이 필요하지 않다고 하는 이 마을에 K는 왜 오게 된 것일까? 행정착오에 의해 토지측량사가 오게 되었다고 촌장은 말한다. 행정착오에 의해 초청된 K의 직업을 토지측량사로 설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토지 측량사란 비교적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작업하는 직업이다. K는 자신의 눈으로 본 것만 믿고 비교적 논리적인 사고를 한다. 그런 K의 캐릭터에 토지 측량사라는 직업은 잘 어울린다. 토지 측량사의 독일어 ‘Landvermesser’는 히브리어로 메시아를 뜻하는 ‘maschoach’와 유사하다. 이런 언어유희는 K가 ‘메시아적’ 태도를 갖게 하기도 한다. “K가 아직은 비천하고 경멸받는 위치에 있지만, 까마득히 먼 장래에는 틀림없이 모든 사람을 능가하리라는 믿음이었다.”(p.212)라는 부분이나, 그의 치유 능력 때문에 고향에서는 그를 늘 ‘쓴 약초’ 라고 불렀다고 하는 부분에서도 그런 해석의 여지가 있다. ‘쓴 약초’란 「만수기」 9장 11절과 관련, K를  모세 같은 해방자로 구상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K가 이 마을에 지팡이를 들고 나타났다는 설정도 의미심장해보인다. 지팡이는 길을 찾는 자라는 의미이거나, 길을 찾고자 하는 의지의 상징일지도 모르겠다.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성, 관청, 클람이 문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추론을 하게 된다. 등장인물들의 대사와 서술자의 묘사를 통해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더듬듯 부분부분 더듬어 가며 추론할 수밖에 없다.


 “비서님(모무스)은 클람이 손에 든 도구 같은 존재이므로 그에게 순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재앙이 있다는 거요.” (p.165)

 “다리목 여관 여주인이 클람에게 이르지 못하게 하는 모든 장애물을 알고 있다면, 그 여인은 아마도 클람에게 이르는 길을 알고 있을 거야. 그녀 자신이 그 길을 직접 내려왔으니까.” (p.227)


 “관청에 대한 경외심은 이곳에 사는 당신들에게는 타고난 것이고, 이후에도 평생에 걸쳐 모든 방면에서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당신들에게 주입되고 있어.(...)” (p.258) 

 

위의 대사들을 보면, 성과 관청, 클람은 종교적인 의미로 쓰인 게 아닐까 추측된다. 이 셋은 약간씩 다른 듯하지만 결국은 한 몸처럼 보인다. 종교 그 자체로도 보이고, 신 또는 사제, 또는 권위 있는 어떤 것, 권위 자체로도 보인다. 이에 순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고, 마을 사람들의 멸시와 혐오를 받는다. 소설 속에서 이방인인 K 외에 마을 사람들의 멸시와 혐오의 대상인 아말리아 가족이 이에 해당된다. 아말리아는 성의 관리인 소르티니의 무례한 구애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가세가 기운다. 마을 사람들은 떠도는 소문과 막연한 불안감 때문에 아말리아 가족을 경멸하고 관계를 끊어버린다. 모두가 배척하는 K와 아말리아 가족은 동병상련의 처지이자 상부상조해야 할 동지이다.      


 아말리아 가족 외에, 의지할 곳 없는 K를 마을에 있을 수 있게 해준 이는 바로 프리다이다. 프리다는 클람의 전 애인이었으나 K와 약혼하고 K가 이 마을에 머물 수 있게 도와준 여인이다. 그녀는 K가 성을 잊고 그녀와의 일상적 삶에 만족하길 바랐으나 뜻대로 되지 앉자 K를 떠난다.      


“유감스럽지만 사실이야, 나는 그녀에게 소홀했어. 하지만 거기에는 이 자리에서 언급하기에는 부적절한 특이한 이유들이 있었어. 만약 그녀가 내게 되돌아온다면 나는 행복하겠지만 또다시 소홀해지고 말 거야. (...)” (p.431)      



  K가 페피에게 프리다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K는 자신을 떠난 프리다를 원망하기는커녕 그녀가 떠난 이유는 자신이 소홀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여느 작품처럼 이 작품에서도 K는 카프카 자신을 의미하고, 프리다는 카프카가 파혼했던 펠리체 바우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카프카가 펠리체 바우어와의 파혼 이후,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렸다는 사실은 그가 남긴 저서들 곳곳에서 드러난다. 이 작품 역시 그런 죄책감이 반영되었다. 카프카가 펠리체 바우어와의 결혼을 망설였던 이유는 그녀와의 안정된 결혼생활을 원하는 마음 한편에, 결혼으로 인해 그의 글쓰기가 영향을 받을까 두려운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가정을 이루는 대신, 문학에의 삶을 택했다. K가 프리다보다는 ‘성’에 집중한 부분과도 연결된다. 그렇다면, 성은 카프카가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이나 문학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그가 찾고자 하는 정체성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카프카는 이 소설을 다 마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우리가 읽을 수 있는 마지막 장면은, K가 마부 게르스테커의 어머니를 만나는 장면이다. 그가 이 소설에서 남긴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그녀는 힘겹게 입을 뗐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그녀가 한 말은―” (p.444)      


 마부 게르스테커가 난데없이 왜 등장했는지, 그의 어머니가 K에게 한 말이 무엇이었을지 너무 궁금하게 하는 엔딩이다. 미완성이 아니라, 시대를 앞서 열린 결말 기법을 시도했다고 봐도 큰 무리가 없지 않을까? K의 ‘성’을 각자 해석하고 싶은 대로 해석해도 무방하듯이 각자가 원하는 결말로 마무리 지은들 어떠하랴. 카프카 본인이 진정 원하는 결말은 K가 성에 들어가는 결말이었을 테다. 그러나 카프카가 쓰고 싶은 것은 ‘소망’이 아니라, 그의 고뇌와 현실이다. 그를 아프게 짓누르는 응어리들과 실존에 대한 질문이 이 작품의 집필의도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K가 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여전히 이방인으로 불안정하게 사는 결말이 준비돼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카프카가 친구 막스브로트에게 귀띔한 결말도 이와 비슷한 새드앤딩이었다고 한다.      


 내가 뒷부분을 이어쓴다면, K가 프리다와 다시 만나 사랑을 하고 성에 들어가 토지 측량사의 일을 시작하는 결말을 쓰고 싶다. 아말리아 가족 또한 소르티니의 사과를 받고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게 쓸 것이다. 작품성이 다소 떨어지더라도 쓰는 동안은 행복할 것 같다. 주인공이 행복하면 나도 행복하니까. 짧은 생에서 온전히 행복을 누리지 못했던 카프카의 삶을 조금이라도 위로하는 마음을 담은 결말이다.      


 카프카가 끝내 도달하지 못했던 성, 때로는 ‘아무것도 없어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모든 것이 자유롭고 경쾌하게 위로 솟은 모습’이었던 성, 그 성을 향한 집념을 꺾지 않았던 그의 삶은 세상으로부터 냉대받고 이해받지 못한 외로운 삶이었다. K가 처한 암담한 처지 속에는 기나긴 겨울 같았던 카프카의 삶이 담겨있다.      


 K는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봄이 오려면 얼마나 더 있어야 할까?”라고 물었던 K의 물음에 페피는 “이곳은 겨울이 길어요.”라고 말했다. “봄이 오려면 얼마나 더 있어야 할까?”라고 카프카가 내게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고 싶다. “봄은 곧 올 거예요. 아무리 춥고 혹독한 겨울도 그 끝에는 항상 봄이 있답니다.”라고. 외롭고 쓸쓸하게 생을 마친 카프카의 등을 봄날처럼 따뜻하게 토닥여주고 싶다. 토닥, 토닥, 토닥, 토닥….     



*읽은 때 : 2020.09.01~2020.09.13.

*기록한 때 : 2020.09.14

*별점 : 4.0/5.0

*한줄평 : 잡힐 듯 잡히지 않고, 닿을 듯 닿을 수 없는 이상에의 슬픈 열망.



매거진의 이전글 내 안에도 살고 있는 ‘시골 사람’_<법 앞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