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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밑

by 김태민

새삼스럽지만 시간이 참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을이 끝나는가 싶더니 불쑥 한파가 찾아왔다. 바쁜 날들을 넘기다 보니 어느새 손길이 계절의 마지막 페이지에 닿았다. 주말을 두 어번 보내고 나면 세밑을 앞두게 된다. 거리를 지날 때마다 트리가 눈에 들어온다. 오랜만에 느끼는 연말분위기라 더 반가웠다.


커피정기구독 입구에 서있는 트리가 예뻐서 사진에 담았다. 반짝이는 불빛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대화는 긴 겨울밤이 하얗게 샐 때까지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계속될 것 같았다. 밖으로 나와서 겨울 속을 걸었다.


한 해를 떠나보내는 아쉬움과 새해를 맞이하는 설렘이 공존하는 시기가 왔다. 세밑을 보내는 마음은 설렘보다는 늘 아쉬움에 가까웠다. 엇갈린 인연이나 지나간 기회를 떠올리면서 주어지지 않은 선택지였던 만약을 상상했다. 새로운 시작을 기약해야 할 시기에 과거를 헤집고 다니면서 미련을 만지작거렸다.


환상통이나 다름없는 공허한 질감을 훑는 손끝이 부끄러웠다. 결핍이 정체성을 대변하는 젊은 날을 보냈던 것 같다. 가져본 적 없는 행복을 상상하고 누려본 적 없는 안정을 바라면서 나는 혼자 겨울나무처럼 외롭게 서있었다. 시간이 흘러 30대의 말미에 이르러서야 내 삶을 부정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게 됐다.


인정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지금은 잃어버린 것들을 더는 세지 않는다. 엇갈림 속에서 길을 찾고 상실을 통해 경험을 얻는다. 배움의 기회는 멀리 있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삶은 가장 좋은 스승이다. 외로운 순간이나 괴로운 시간들은 힘겨웠지만 전부 선명한 몸짓을 남겼다.


몇몇은 상처가 되고 여기저기에 선명한 흉터들이 생겼지만 새살이 돋은 자리가 더 많았다. 어떻게든 살아가기만 하면 그동안 모르고 살았던 의미를 만나게 된다. 긴 장마 끝에 구름이 걷히고 푸른 하늘이 드러나듯이 가본 적 없는 새로운 길이 눈앞에 놓여있었다. 초라한 옷을 입고 있어도 특별할 것 없어 보여도 기회는 기회다.


시작과 기회는 수식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 단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잘 살지는 못했지만 지금까지 잘 살아남았다. 버티고 견디면서 자리를 지켰다. 앞서 가면서 치고 나갈만한 눈부신 추진력은 없었지만 묵묵히 내 길을 걸었다. 주저앉은 적도 있고 헤매다 시간을 허비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앞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너무 느려서 무의미해 보였던 걸음들이 모여서 지금 이 순간을 만들었다. 사소해서 별 것 아니라고 치부했던 시간들이 변화로 이어졌다. 연초에 텅 비어있던 내면의 공간을 연말이 돼서 다시 확인한다. 온기로 빈자리를 채웠다. 감사한 인연들이 건넨 소중한 손길을 맞잡았다.


여전히 현실은 녹록지 않지만 희망의 감촉을 기억에 새기고 잊지 않게 됐다. 삶은 아름답지 않지만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새로 부여하는데 의미가 있다. 가치를 비교하는 줄 세우기를 그만두고 비로소 진짜 행복을 알게 됐다. 내 것이었지만 더는 내게 없는 것들과 뒤늦게 작별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손을 흔들며 과거와 악수를 했다.


나는 찬란한 여름 한가운데서 지나간 봄을 그리워하던 사람이었다. 계절이 다 저물고 나서야 여름이 찬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성실하게 흐르는 시간은 나를 가을의 문턱 앞에 데려다 놨다. 이제는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연습을 하고 있다. 똑같은 실수를 더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겨울은 한 해의 시작과 끝을 품고 있는 계절이다. 세밑과 새해 모두 겨울 속에 있다. 끝이 가까워지면 시작을 돌아보게 된다. 정말 긴 일 년을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군데군데 희미해진 구간들이 보인다. 힘든 순간들도 많았지만 의미 있는 순간들이 더 많았다. 무의미하다고 여겼던 날들이 지금은 저마다 고유한 빛깔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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