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많이 풀렸다. 하얀 햇빛이 보도블록 군데군데 크고 작은 빛웅덩이를 만들었다. 따스한 봄볕이다. 봄을 기다렸다. 햇살을 쬐며 걷다 보니 등줄기에 살짝 땀이 맺혔다. 코트를 벗어서 팔에 걸쳤다. 겨울은 인사도 없이 떠나버렸다. 추억을 많이 만든 계절이라 그런지 조금 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춥지만 따뜻한 겨울을 보냈다. 가끔씩 행복했던 순간들을 떠올리고 미소 짓는다. 다음 주면 3월이다. 무엇이든 시작하기 좋은 계절이 왔다. 봄을 맞이할 시간이다. 병원을 나와서 평촌 이마트에 들렀다. 입맛을 돋울 만한 찬거리와 간식을 샀다. 오늘 저녁메뉴는 달래장을 곁들인 봄동비빔밥이다.
행복은 현재진행형이다. 나중에 혹은 언젠가를 생각할 필요는 없다. 오늘 지금 이 순간 느낄 수 있는 작은 기쁨은 전부 다 행복이다. 따스한 햇살을 맞으며 거리를 걷는 내내 행복했다. 봄동이랑 불고기를 세일가에 사서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버스를 탔다.
사소한 일상이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 하루치 기쁨이 깃들어있다. 작은 행복을 안고 집으로 간다. 만안구와 동안구를 가로지르는 6번 버스는 나의 발이다. 창 밖으로 매일 보는 익숙한 풍경이 느린 속도로 지나간다. 범계와 호계를 지나 다리 두 개를 건너면 명학이다.
오후의 은은한 자연광이 세상을 아름답게 물들였다. 맑은 겨울 하늘아래 투명한 유리알처럼 반짝였던 햇살이 옷을 갈아입었다. 봄볕은 샛노란 개나리를 닮았다. 도로 옆 공장 단지의 무채색 풍경을 화사한 색감으로 색칠했다. 거리에 늘어서있는 가로수들은 벌써 가지 끝에 푸르스름한 새순을 달고 있다.
하차벨을 누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드를 찍고 고개를 돌리다 노선표에 눈길이 닿았다. 정류장 목록을 훑어보다 종점인 청란공원에 시선이 머물렀다. 어딘가 모르게 친숙한 이름이었다. 천천히 기억을 더듬다 이내 추억을 거슬러 올라갔다. 지도앱을 검색했다.
중학교 시절 하굣길에 자주 갔던 작은 공원이었다. 매일 6번 버스를 타면서도 중학교 이후로 가본 적은 없다. 그냥 잊고 살았다. 쉴 새 없이 밀려드는 하루하루는 파도 같았다. 모래톱 위에 쓴 글씨가 지워지는 것처럼 그냥 잊고 지냈다. 하지만 잃어버리지는 않았다. 기억은 처음 그 자리에 아직 남아있었다.
집에 가는 버스를 기다릴 겸 공원에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대화의 주제는 기억나지 않는다. 시시콜콜한 잡담이 대부분이었겠지만 매번 즐거웠다. 빈집에 들어가기 싫었다. 타야 할 버스를 몇 대나 보내고 나서 친구들과 헤어졌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꺼내 읽다 해가 기울 때쯤 버스를 탔다.
청란공원은 늘 조용했다. 벤치에 앉아있으면 눈앞에 푸른 옷을 입은 와룡산이 보였다. 은행나무가 많아서 가을이면 노란빛으로 물드는 모습이 예뻤다. 양명고 진입로에 있는 은행나무길도 아름다웠다. 기억에 남을 만큼 인상적이었다. 잠겨있었던 문이 열리고 오래된 기억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 나름대로 괜찮았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라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감정은 희석된다. 특별한 순간이나 평범한 나날이나 같은 기억의 서랍 속에 들어간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똑같이 나이를 먹는다.
그러다 보면 무슨 일이든 그런대로 다 괜찮아진다. 무던해지거나 무덤덤해진다. 세월이라고 불러야 할 만큼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기억은 생생하다. 지난 시절을 함께했던 친구들의 얼굴이 잠시 떠올랐다. 다들 잘 살고 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때가 되면 전부 다 그리워진다.
풍경이나 사람이나 전부 다 그리움을 품은 아련한 빛으로 물든다. 정류장에 내려서 환승을 하려다 그만뒀다. 나중에 마음이 닿으면 그때 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