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일기

행복은 마음의 여유다

by 김태민


일을 그만두고 한동안 쉬면서 나는 제대로 된 백수가 되었다. 자고 싶을 때 잤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났다. 그래봐야 늘 6시면 눈이 떠졌다.그야말로 습관의 괴로움. 그래도 밥은 늘 꼬박꼬박 챙겨먹었다. 배가 고프면 뭐든 일이 안 된다. 낮에는 옥상에 올라가 화분을 이리저리 옮기고 꽃에 물을 줬다. 가을이라 코스모스가 잘 자란다. 계절은 9월이지만 여름의 끝이 남기고간 해바라기들은 높이 하늘 끝까지 자랄 듯 싱싱했다.

화분에 물을 주고 평상에 드러누워 하늘을 본다. 매일매일 하늘은 예뻤다. 파랗고 새파랗고 푸르스름하고 시퍼런 하늘. 하늘처럼 매일매일 봐도 질리지 않는 여자가 있다면 앞뒤 가리지 말고 달려들어야지. 글자 별로 없는 화집이나 그림책을 옆에 놓고 간간히 보다 한 숨잔다. 옥탑방에 묵혀놨던 기타를 갖고 나와 튜닝을 좀 하다가 C코드 몇 번 잡아보다가 내려놓는다. 시간은 오후에서 늦은 오후로 흐르고 세상은 매일 그랬듯이 쳇바퀴를 돌린다. 거기서 나만 외따로이 멈춰있는 풍경.

게으름과 잉여로움 사이, 나태와 여유로움 사이. 그 어디쯤에 나의 생활이 있다. 늘어질 때로 늘어진 카세트테이프처럼 ‘이걸 어디다 써?’ 싶지만 늘어진 대로의 맛이 살아있다. 출퇴근하던 길은 거의 잊어버렸고 대신 매일 집 앞 공원을 한가로이 산책하면서 늦은 오후를 보냈다. 벤치엔 늘 어르신들과 아주머니들이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는다. 은행나무와 포플러가 빽빽하니 자리 잡은 공원엔 곧잘 바람이 불었고 나뭇잎과 가지가 부대끼는 소리는 마냥 싱그러웠다. 그 사이로 들려오는 이야기들은 다 사소한 것이었고 다 별 것 아닌 것이었다. 그래서 누군가의 생활을 담고 있었고 어느 집의 희로애락이 녹아있었다. 사람 사는 이야기는 그렇게 간단하고 바람처럼 가볍고 흔한 것이기에, 어디서 들어도 어디서 들려와도 듣고 있으면 맘이 편했다.

저녁이면 친구들을 만나 같이 밥을 먹거나 술을 한 잔 한다.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한 녀석들은 힘들다는 말 대신 쉼 없이 술잔을 기울였고, 취업전선에 뛰어든 놈들은 사는 게 녹록치 않다며 고개를 뚝 떨어뜨린다. 그런 친구들에게 어디서 주워들은 책에서 몇 자 보고 기억한 구절들을 늘어놓는다. 진심어린 위로를 섞어 술잔처럼 툭 하니 건네는 말속에 위로를 담아. 그리고 계산은 백수가 한다. 마음이 편안한 놈이 제일 부자다 지갑무게와는 상관없이.

이렇게 살았던 거의 매일이 걱정 없는 하루였다. 뭐먹고 살지 뭐하고 살지? 하는 걱정은 없었다. 잘된 놈을 봐도 걱정 잘 안 되는 놈들을 봐도 걱정이던 생활은 까마득한 기억 속. 좋은 소식이 들려오면 진심으로 축하하게 되고 안 좋은 소식이 들려오면 안부대신 얼굴을 보러갔다. 게으름과 여유로움 속에서 사람다움을 찾아가는 백수생활. 행복한 생활이란 거 사실 별것 없는 모양이다.(2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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