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와 화해

삶을 조금 더 사랑하는 방법

by 김태민


중학교 2학년 J. D. 샐린저가 쓴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었을 때 나는 50페이지쯤 읽다가 책을 던져버렸다. 문체도 이상했고 도무지 주인공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 가 없었다. 산만한 주절거림과 갑작스레 튀어나오는 회상이 글을 읽는데 몹시 거슬렸기에 난 그 날 저녁 학원가는 길에 책을 반납해버렸다. 그리고 10년이 훨씬 지나 20대 중반에 우연찮게 다시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었을 때 나는 전혀 새로운 느낌을 받았다.

이제까지 이해되지 않던 문장속의 의미들이 가슴으로 밀려들었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깊은 울림을 주인공과 함께 공유하고 있었다. 문득 떠오르는 책 속의 인물들에게서 이젠 떠나간 한 때는 내 사람이라 불렸던 이들의 그림자를 읽어낼 수 있었고, 책의 말미에 기록된 한 문장. '모든 것들 기억해내는 순간 당신은 모든 것 들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라는 말에 더할 수 없는 진한 아련함을 느꼈다.

이해라는 감정은 때론 아주 오랜 시간을 거쳐 본래의 색깔을 찾기도 하는 게 아닐까싶다. 그리고 새롭게 덧입혀진 빛깔은 지금 이 순간의 내 모습을 투영하여 고요히 빛난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 많은 사람들을 떠나보내는 동안 우리는 얼마나 많은 오해와 이해를 해야 하는 걸까.그 수많은 엇갈림과 비틀거림 속에서 사람다움을 지키는 일이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 번의 오해로 사람을 잃어버리고 한 번의 이해로 새로운 인연을 마주 하게 되는 일. 언뜻 보면 간결해보이지만 그 속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고민들은 삶의 아주 긴 밤을 하얗게 새게 만드는 일이다.

뜻도 모르고 흥얼거렸던 팝송의 가사를 뒤늦게 알았을 때의 생경함은 사실 반가움 보다는 낯설음에 가깝다. 그 안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다시 이해를 경험하는 순간이 오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걸린다. 모두가 다른 삶을 살아왔기에 우리에게 이해는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에게 호텔 캘리포니아는 아련함을 주는 노래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겐 아리송한 가사가 주는 메시지가 불편할 수 있을 테니.

다만, 뒤늦게 와 닿은 이해의 순간은 삶의 전혀 새로운 부분을 주목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모두 같다. 그리고 오랜 시간을 건너온 이해의 순간은 날선 감정이나 깊은 회한대신 빛바랜 추억의 색깔을 입고 있다. 누군가는 그 바래버린 빛깔 속에서 희미한 밉살스러움의 향기를 맡을 지도 모를 일이지만, 대체로 우리에게 날아드는 늦은 이해의 순간은 봄바람에 실려 온 순한 진달래향기처럼 보드랍고 은은하다.

'불현듯'이란 단어가 낯설지 않게 느껴질 때. 아주 오래전 떠나간 누군가가 내게 했던 행동들에 씌워진 장막이 벗겨질 때. 잊혀 진 세월의 틈새아래 조각나있던 기억의 편린들이 반짝이며 하늘거릴 때 우리는 그 순간 어쩌면 좀 더 어른에 가까워지는지도 모르겠다. 평생을 배우고 성장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시인의 말처럼 오래되어 낡고 해묵은 회상 속에서 우리는 이해라는 행위를 통해 조금 더 성숙해지는 것은 아닐까. 지금 나와 당신 그리고 우리를 둘러쌓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 속에 응어리진 매듭도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는 아련한 빛깔을 띠고 찾아올지 모른다. ‘그 때에는 미안 했어,’ 라는 희미한 미소와 함께 친절한 손길을 건 낼 지도 모른다. 그러니 어찌되든 살아볼 일이다. 지금 이해되지 않은 수많은 물음들에 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은 결국 자신이기에 끝까지 살아남아 확인해야 하는 게 인생에 대한 책임이란 생각을 한다.

고등학생 시절 읽었던 '입속의 검은 잎'이 주던 불편함이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저릿한 울림으로 돌아온 감동을 나는 기억한다. 분명 앞으로 살아가다보면 나는 내 삶속에서 이해되지 않은 것들과 화해하며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긍정적인 희망사항이든 소소한 바람이든 끝까지 살아봐야겠다. 마지막의 마지막이 오기 전 까지 끝나지 않는 것이 삶이듯 날선 오해와 엇갈림이 반가운 악수로 돌아올 때 까지 이 삶을 살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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