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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Sep 17. 2024

카이키

 지난겨울 동네에서 못 보던 카페를 발견했다. 히라가나로 <카이키>라고 쓴 작은 간판이 벽돌로 장식된 외벽에 붙어있었다. 동글동글한 폰트를 사용해서 그런지 글씨체가 귀여웠다. 커다란 통창 유리 밖으로 흘러나온 오렌지 빛 조명이 가게 앞 보도를 환하게 물들였다. 카운터 뒤로 늘어서있는 위스키가 눈에 들어왔다.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 앞에 머그컵과 글라스가 놓여있었다. 커피와 위스키를 함께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매장 내부에 붙어있는 알록달록한 포스터들이 눈길을 끌었다. 도쿄의 조용한 골목에 있을 법한 분위기라 꽤 마음에 들었다.


 등 뒤에서 불어온 찬바람을 핑계 삼아 들어가려다 말았다.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 시간이 애매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사진만 몇 장 찍고 다음을 기약하면서 돌아섰다. 멋진 카페나 맛집을 좋아하는 주변 지인들에게 사진을 보여줬다. 역시나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다음에 같이 가기로 약속을 했다. 그 후로도 몇 번이나 가게 앞을 지나갔지만 막상 문을 열고 들어간 적은 없었다. 바쁘게 지내다 보니 어느새 계절은 두 번이나 바뀌었다. 그러다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카이키가 생각났다. 지인에게 연락을 하고 사전답사 겸 혼자 먼저 가보기로 했다. 무더운 여름밤 시원한 하이볼 한 잔을 마실 생각을 하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냉천로를 가로질러 걷다 천천히 수리산로로 내려갔다. 하지만 보도 위를 환하게 물들이는 가게불빛이 보이지 않았다.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나도 모르게 입에서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빨간 벽돌건물은 그대로였지만 간판이 사라졌다. 카이키가 있던 자리를 처음 보는 치킨집이 차지했다. 실망감은 곧 짜증으로 변했다. 끈적이는 습기를 품은 더운 바람이 얼굴을 때리고 지나갔다. 등판에 들러붙은 티셔츠를 손으로 잡아떼면서 길게 심호흡을 했다. 허무했다. 별일 아니라고 여기고 넘어가려고 했지만 아쉬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우물쭈물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 생각났다.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이었지만 결국 후회는 남는다. 망설이는 것보다 행동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갈까 말까 할 때는 역시 가는 쪽이 맞다. 사라진 카이키를 떠올리면서 동시에 가게 앞에서 망설이다 지나치는 내 모습이 오버랩됐다. 한 번도 열어본 적 없는 선물상자를 잃어버리고 나서 들여다보는 기분이다. 집 앞 카페에 들러서 아쉬운 대로 차가운 밀크티를 마셨다. 씁쓸한 뒷맛이 평소보다 좀 더 텁텁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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