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태민 Oct 14. 2024

주머니 속의 기억

 해가 많이 짧아졌다. 여섯 시만 되면 하늘이 까맣게 변한다. 10월 중순에 가까워지면서 일교차도 많이 벌어졌다. 저녁 공기가 차갑다. 외출복으로 셔츠 대신에 재킷을 골랐다. 주머니에 무심코 손을 넣었는데 낯선 감촉이 느껴졌다. 꺼내보니 동그랗게 말려있는 작은 종이뭉치다. 살짝 펴봤더니 자일리톨 껌포장지다. 언제 주머니에 넣어뒀는지 생각해 보다 잊고 지냈던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은 곁에 없는 친구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 추억이나 기억은 때때로 아주 사소한 사물에 깃들어있다. 손길이나 눈길이 닿으면 기억은 머릿속에서 맘대로 문을 열고 흘러나온다. 그럴 때마다 사이코메트리 능력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가만히 서서 기억이 만들어내는 풍경을 잠시 바라봤다. 돌아오지 않을 순간들은 잠시 반짝이다 조용히 사라졌다. 햇살을 받아 빛나는 물비늘이 흘러가는 것처럼 눈앞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짧은 백일몽에서 깨자마자 손에 쥔 종이뭉치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기억이 흘러나온 문을 닫고 그 앞에 추억을 자물쇠 삼아 걸어놨다. 꼬리를 물듯이 따라 나온 상념을 빠르게 털어냈다. 주머니 속에서 찾은 기억에 잠시 마음이 흔들렸다. 등 뒤로 바람이 불었다. 귀 끝에 닿은 공기가 차다. 피부로 계절감을 느끼면서 천천히 현실감을 되찾았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그래서 이제는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머물다간 자리는 늘 온기와 흔적이 남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결국 둘 다 사라진다. 감정과 함께 온기는 식는다. 몸과 마음을 정신없이 굴리다 보면 다 지나간다. 아쉬움 대신에 먼지처럼 달라붙은 생활감만 남는다. 계절이나 날씨처럼 마음도 변한다. 그래서 늘 현실이 슬픔을 이긴다. 단단하게 박힌 감정을 생각보다 손쉽게 밀어낸다. 텅 빈 주머니 속에 양손을 집어넣고 천천히 걸었다. 시야에 들어온 어두운 하늘이 유난히 낮아 보였다. 횡단보도 앞에서 건물 위로 지나가는 담청색 구름이 불빛에 물드는 모습을 구경했다.


 남은 사람이나 떠난 사람이나 각자의 길을 따라 걷는다. 갈림길 앞에서 서로 다른 선택을 한 것뿐이다. 납득할만한 이유를 고심하거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결과가 과정을 말해준다. 지나간 사람이나 사건은 더 이상 달라지거나 변하지 않는다. 어차피 엔딩은 하나뿐이다. 열린 결말은 없다. 소망이 아니라 욕망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편해진다. 단념하고 포기하면서 하나씩 새로 배우게 된다. 내 것이 아닌 삶이나 사람을 보내주는 것이 행복해지는 길이다. 주머니를 비우면서 마음도 함께 비웠다. 완전히 텅 비었지만 그만큼 편안해졌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