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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Oct 07. 2024

정조대왕능행차

 10월만 되면 늘 정조대왕능행차를 구경한다. 코로나 시기를 제외하고 한 번도 놓친 적 없는 행사다. 아침부터 날이 흐렸다. 작년에는 비가 내렸다. 비를 맞으며 지나가는 우중행렬이 기억 속에 남아있다. 집에서 1분 거리라 느긋하게 나왔다. 멀리서 북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인도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동네 사람들만 보였는데 일 년 사이에 위상이 달라졌다. 경찰인력이 도로 주변에 배치됐다. 카메라와 촬영용 항공드론이 보였다. 거리에 태평소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화려한 오방색 전통의상을 입은 악사와 무사들의 행렬이 눈에 들어왔다.


 백마를 탄 정조는 황금빛 용을 수놓은 곤룡포를 입고 있어서 눈길을 끌었다. 올해는 특히 유모차를 끌고 나온 젊은 부부들이 많았다. 구군복을 두르고 말에 올라탄 무관들은 아이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환한 미소로 답하는 아이들이 참 예뻐 보였다. 가족 단위로 나온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어르신들이 손주들에게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는 모습이 정겹게 느껴졌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다들 핸드폰을 꺼내서 사진이나 영상을 찍었다. 과거와 현대가 어우러지는 풍경은 볼 때마다 매력적이다. 잿빛 하늘아래 선명한 원색의 한복이 인상적인 대비를 만들어냈다.

 물기를 머금은 바람이 낮게 불었다. 기수들이 들고 있는 깃발은 바람을 만나 부드럽게 윤무를 췄다. 성결대사거리에서 시민대로 방향으로 접어들면서 대열이 나뉘었다. 행렬을 따르는 인파는 횡단보도를 건너갔다. 인도에 남은 이들은 멀어져 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기록을 토대로 역사를 그대로 재현하는 일은 정말 멋진 일이다. 짧은 순간이지만 능행차를 볼 때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기분이 든다. 살아본 적 없는 시대의 풍경을 보는 감정은 참 각별하다.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좀처럼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다들 한동안 가만히 서있었다.


 알록달록한 행렬의 꼬리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자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났다. 복잡했던 인도는 이내 한산해졌다. 막혀있던 도로 위로 차들이 쏟아져 나왔다. 차량배기음을 비롯한 익숙한 백색소음이 금세 거리를 메웠다. 옅은 회색 구름 아래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행렬이 수원 융릉에 도착할 때쯤엔 가랑비가 내릴지도 모르겠다. 작년에도 날이 흐리고 비가 왔다. 일 년이 지나갔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실감했다. 6월이 한 해의 반환점이라면 정조대왕능행차를 보는 날은 남은 시간을 가늠해 보는 기점이다. 내년이 되면 나는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서있을까. 어떤 기분으로 어떤 마음으로 왕의 행렬을 구경하게 될까. 오늘 쓴 이 글을 다시 읽어보면서 지금 이 순간을 회상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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