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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민 Sep 25. 2024

은비령

 평일저녁이라 도서관은 한산했다. 책장 사이를 넘나들면서 책을 고르고 있는데 빨간 꽃 그림이 붙어있는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손을 뻗기 전에 먼저 제목을 확인했다. <은비령> 기억 속에 남아있는 제목이다. 아는 책이다. 하지만 정작 읽지는 못했다. 은비령은 몇 번이나 읽으려다 번번이 읽지 못하고 넘어갔던 책이다. 벌써 20년이 넘었다. 처음 이 소설을 발견했던 곳은 중학교 도서실이었다. 교실 절반도 되지 않는 작은 규모라 책이 별로 없었다. 동네 비디오대여점에 있는 만화책 코너보다 작은 공간이었다. 거의 매일 도서실을 찾다 보니 사서선생님과 가까워졌다.


 선생님은 내게 소설에 관심을 가져보라고 이야기했다. 그날 마침 눈에 들어온 책이 은비령이었다. 흰색과 미색의 중간 정도되는 색의 하드커버로 덮여있는 적당히 두꺼운 책. 음각으로 은비령이라는 제목이 멋스럽게 장식되어 있었다. 제목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은하수를 닮은 작은 그림이 책에 붙어있는 것을 보고 우주와 관련된 내용이라고 생각했다. 몇 페이지를 읽고 나서 현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라는 것을 알았다. 조금 더 읽어볼까 하다가 도서실 문 닫을 시간이라 밖으로 나왔다. 거의 매일 책을 보러 갔지만 은비령을 다시 읽은 적은 없었다.


 시간이 착실하게 흐르는 동안 성실하게 나이를 먹고살았다. 그렇게 성인이 됐다. 휴학생이었던 나는 학교 도서관에서 근로장학생으로 일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늘 책 주변을 맴도는 생활을 한다. 책벌레였던 내게 도서관보다 좋은 일자리는 없었다. 시험기간을 제외하면 도서관을 찾는 학생 수는 적은 편이었다. 지루한 책을 벗 삼는 것보다 학교 친구들과 술 마시러 가는 쪽이 더 즐거운 시기다. 집과 도서관을 오가는 평범한 일상이 이어지던 내게 은비령이 찾아왔다. 반납도서를 정리하고 있었는데 그 속에서 은비령을 발견했다. 중학생 시절이 기억이 재생버튼을 누른 것처럼 머릿속으로 흘러나왔다. 그러나 읽지 않았다.


 잠시 추억을 회상하고 나서 곧바로 책장에 꽂아버렸다. 읽으려고 빌려둔 책이 집에 잔뜩 쌓여있었다. 반가운 마음이 들었지만 막상 손이 가지 않았다. 만남은 짧았다. 그 후로 다시 1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갔다.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표지는 구판이 됐다. 개정판은 얇은 책으로 나왔다. 소년기에 처음 만나 청년기에 재회하고 이제 중년을 목전에 두고 마주쳤다. 피천득의 수필 인연에 나오는 아사코가 생각났다. 사람이나 사물이나 만남은 모두 적절한 때가 있다. 너무 이르면 받아들이기 힘들고 너무 늦으면 눈에 들아오지 않는다. 책이 내게 오기까지 22년이 걸렸다. 이제는 읽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첫 장을 펼치자마자 기억이 추억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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